2006독일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3차전 한국 대 우즈베키스탄전이 열리고 있던 서울월드컵경기장은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우즈베키스탄 골에어리어 오른쪽에서 터진 그림같은 발리슛이 섬광처럼 포물선을 그리며 우즈베키스탄의 그물을 뒤흔들었기 때문이었다.이 시각 한국은 1-0으로 우즈베키스탄을 앞서고 있었다. 그러나 앞서 사흘전에 사우디 담맘에서 2-0으로 패한 후유증 탓에 국민들은 리드를 지키고는 있었지만 왠지 불안했다. 그런 상황에서 후반 17분에 터진 통렬한 발리슛은 그야말로 전국민의 막힌 가슴을 단방에 뚫어준 시원한 골이었다. 그 주인공은 이동국이었다. 이동국은 후반 17분 차두리가 내준 볼을 그림 같은 오른발 발리슛으로 연결, 상대의 오른쪽 상단 골네트를 흔들었다. 불안한 리드에서 터진 통렬한 쐐기골이었기에 그 감격은 더했다.
골을 확인한 뒤 이동국은 특유의 눈부신 웃음을 쏟아냈다. 본프레레 감독과 팬들은 졸이던 가슴을 그제서야 쓸어내렸다. 여기저기서 “역시, 이동국” “역시, 본프레레의 황태자”라는 찬사가 쏟아졌다.20백넘버 20번 이동국그의 나이 이제 스물 여섯, 또래들은 소년 시절 꿈을 향해 첫 발을 내디딜 때다. 그러나 그는 너무 어린 나이에 꿈을 이뤘고, 얼마 후 쓰디쓴 좌절을 맛봤다. 밑바닥을 헤매다가 정상까지 기어올랐다. 축구 대표팀의 골게터 이동국(포항 스틸러스)의 얘기다.이동국은 몇 달새 많은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지난해 12월 독일과의 친선전에서 터뜨린 터닝슈팅을 시작으로, 지난 2월 9일 쿠웨이트와의 최종예선 1차전에서 터닝 발리슈팅, 이번 우즈베키스탄전에서 발리슈팅 등 그가 연출해낸 득점장면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심리적 압박이 큰 상황, 불안정한 자세에서도 어떻게 해서든 유효슈팅을 날리는 골감각은 예술에 가깝다는 느낌이 든다.이동국은 본프레레 감독 취임 이후 A매치 18경기에서 무려 10골을 터뜨렸다.
대표팀에서 단연 최고득점이다. 이동국은 월드컵 예선전에서만 4득점을 올렸다. 이는 아시아 8개국 선수 가운데 3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19세상을 덥썩 삼키다이동국은 열아홉이던 98년 포항 스틸러스에 입단하며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대표팀 사령탑이었던 차범근 감독의 눈에 들어 프랑스월드컵 무대에까지 서는 영광을 누린다. 당시 16강을 바라보던 대표팀은 1무2패라는 참담한 성적으로 쓸쓸히 돌아왔다. 대표팀의 유일한 위안거리는 이동국의 발굴이었다. 특히 이동국은 한국이 0-5로 대패한 네덜란드전에서 후반 교체 투입돼 폭발적인 중거리슛과 위력적인 헤딩슛을 선보였다.이동국은 곧 한국 축구의 미래로 상징됐다.
축구계는 대표팀 골잡이였던 황선홍의 대를 이을, 혹은 그를 넘어설 만한 재목을 발굴했다며 야단법석이었다. 잘생긴 얼굴과 화사한 미소는 그를 더욱 아름답게 포장했다.이동국은 98년 아시아청소년대회에서 무려 5골을 몰아치며 한국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예선전에서도 골감각을 이어가 올림픽 4회 연속 진출의 일등공신이 됐다. 레바논에서 열린 아시안컵에서는 6골을 쓸어담으며 득점왕에 올랐다. 젊은 나이에 화려한 이력을 쌓았던 이동국은 2000년 분데스리가 중위권팀인 베르더 브레멘으로 임대 이적했다. 6개월 동안 기대만큼의 활약을 한 덕분에 완전 이적 계약을 했지만 7경기에서 무득점에 그치며 재계약에 실패했다. 축구인생에서 처음 맛본 좌절이었다.23낭떠러지로 추락이후 이동국을 평가하는 시선은 점차 싸늘해지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게으른 천재’로 불렸고, 팀 융화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선수로 낙인찍혔다.
재능 많고, 어린 나이에 스타가 된 선수들이 대부분 겪는 슬럼프이지만 이동국은 쉽게 극복하지 못했다. 타이밍이 너무 좋지 않았다. 2002년 히딩크 대표팀 감독은 성실하고 뚝심좋은 선수들로 빠르고 악착 같은 축구를 선보이려 했다. 당연히 ‘게으른 천재’와는 코드가 맞지 않아 이동국을 월드컵 대표팀 명단에서 제외했다. 한국민의 축제였던 2002년 한·일 월드컵. 한국 대표팀은 전국민의 염원이었던 월드컵 1승을 거뒀다. 기세를 몰아 16강, 8강, 4강까지 진출하며 세계를 놀라게 했고 대한민국을 함성과 눈물로 뒤덮이게 했다.이동국에게 2002년은 차라리 지옥이었다. 월드컵 기간 내내 술독에 빠져 지내며 인생을 비관했다. 자신을 버렸던 히딩크 감독이 국민적인 영웅이 됐고, 과거에 대표팀에서 함께 뛰던 동료들은 자신과 격이 다른 선수들이 돼버렸다. 월드컵 대표팀 중 군 미필자들은 병역 특례 혜택까지 받았다.
이동국은 훗날 “나는 월드컵 때 폐인처럼 지냈다. 자살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며 충격적인 고백을 하기도 했다. 세상이 원망스럽고, 병역에 대한 걱정도 커져만 갔다. 축구에 대한 흥미따위는 진작에 잃어버렸다. 사람들은 낭떠러지로 추락한 이동국을 이미 잊고 있었다.사람이 초라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이동국은 친구 자취방을 숙소 삼아 연고도 없는 영남대에서 재활훈련을 했다. 남들에게 초라해진 모습을 들킬까봐 일부러 씩씩한 웃음을 지어보였지만, 그럴수록 그의 슬픔은 더욱 크게만 전해졌다.이동국은 2003년 초 광주 상무에 입대했다. 2002한일월드컵 전사들이 저마다 거금을 받고 유럽으로, 일본으로 진출했을 때 이동국은 선수들에게 ‘면허정지’로 일컬어지는 군대에 간 것이다. 새로운 환경에서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단다.
히딩크 감독 후임으로 코엘류 감독이 대표팀 사령탑으로 부임했다. 이동국은 잠시 코엘류 감독의 부름을 받기도 했지만 발가락 부상으로 또다시 대표팀 명단에서 빠졌다. 그리고는 또한번 잊혀졌다.25기어서 최정상까지이동국은 상무에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처음에는 답답하기만 했던 그곳 생활이 익숙해지자 체질에 잘 맞았다. 무엇보다 주위에 신경을 쓰지 않고 훈련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점이 좋았다. 이동국은 정신력을 다잡을 계기도 마련했다. 추락할 때는 순간이지만, 다시 정상에 오르기까지는 적지않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군인정신으로 무장한 이동국을 ‘게으른 천재’라고 힐난하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코엘류 감독이 사퇴 여론을 이기지 못해 퇴임한 지난해 7월. 후임 본프레레 감독은 대표팀을 맡자마자 이동국을 호출했다. “그때 심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처음 가방을 메고 학교를 가는, 그런 느낌이랄까. 예전에는 태극마크를 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이동국은 지난해 말부터 폭발적인 득점력을 선보이며 본프레레 감독의 전폭적인 성원을 얻기 시작했다.
본프레레 감독은 “아시아에서 그만한 골잡이를 찾기란 쉽지 않다”며 이동국을 껴안았다. 그의 별명은 어느새 ‘본프레레의 황태자’로 바뀌어 있었다. 본프레레 감독은 대표팀을 맡은 뒤 9승5무4패로 그저그런 성적을 기록 중이다. 이동국이 없었다면 자리가 위태할지도 모를 상황이다. 본프레레 감독이 이동국에게 기회를 줬고, 이동국이 본프레레 감독을 살린 셈이다.이동국은 지난달 25일 상무에서 전역, 포항 스틸러스로 돌아왔다. 2년 연봉 합계가 10억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국내 최고 대우를 보장받았다. 입대 전 연봉이 2억4,000만원에서 두 배 이상 껑충 뛰었다. 2년 만에 그의 위상은 이렇게 달라져 있었다. 26그리고 다시 시작이동국은 공을 차는 것이 마냥 신나고 재미 있다. 이동국은 지난달 25일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경기에서 오른쪽 허벅지 뒷근육을 다쳤다. 통증이 심해 우즈베키스탄전 직전까지 출전이 불투명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동국은 “하는 데까지 해보자”며 의무팀장을 설득해 그라운드에 섰고, 멋진 발리슛을 성공시켰다.밑바닥부터 정상까지 기어 올라온 사람은 다시는 내려가기 싫어한다. 이동국이 부상 투혼을 발휘하며 뛰었던 이유다.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다. 이동국은 몇 년 동안 그답지 않게 눈물도 흘려봤고, 겸손도 배웠다. 그리고 조금은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단다.“요즘은 매일 행복하다. 운동할 수 있는 것이 고맙고 팬들과 언론의 관심을 받는 것이 기쁘다. 감정이 지나쳐서인지 가끔 무섭기도 하다. 내가 다치면 어쩌나, 슬럼프가 찾아오면 어쩌나, 갑자기 나보다 잘 하는 선수가 나타나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기도 한다.”이제 처음 시작한다고 해도 늦지 않은 나이, 이동국은 스물 여섯이다. 앳된 미소년이었던 그는 홍역을 치르고, 사춘기 방황을 거쳐 팬 앞에 다시 섰다. 한층 단단해지고 더욱 듬직해진 모습으로 말이다.
김식 스포츠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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