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의 늪’에 빠진 노무현 대통령의 오른팔
‘시련의 늪’에 빠진 노무현 대통령의 오른팔
  • 이인철 
  • 입력 2005-04-15 09:00
  • 승인 2005.04.15 0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최측근 이광재 의원이 철도공사의 러시아 유전개발 사업과 관련한 의혹으로 곤경에 처해있다.“또…”정치권의 시선이 한 40대 국회의원에게 쏠려 있다.주인공은 노무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이광재 의원(열린우리당 강원도 태백·영월·평창·정선)이다. 느닺없이 터져나온 철도공사의 러시아 유전개발사업과 관련한 의혹의 중심에 이 의원이 거론되고 있기 때문이다.이 의원이 이 사건의 한가운데 거론되면서, 사건의 진실여부를 떠나 상당수 국민들은 끝없이 이어지는 권력자들의 개운찮은 행보에 대해 피곤함마저 느끼고 있다.

일부에선 “사건의 진실과는 상관없이 의혹의 중심에 거론된다는 사실만으로도 도무지 권력자들을 믿을 수 없다”는 냉소적인 반응까지 보이고 있다.이번 사건에 대해 한나라당 등 야권에서는 국정조사까지 거론하면서 정치쟁점화하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물론 이 의원을 비롯한 여권과 관련 부처에서는 사안이 확대되는 것을 최대한 막으려는 입장이다. 국민들의 알 권리보다는 정파간 이해관계를 염두에 둔 정치권의 행보라는 점에서 또다른 식상함을 던져주고 있다.어쨌든 이광재 의원은 이번 사건으로 인해 다시 한번 검증의 심판대에 오른 것만은 분명하다.

그의 정치생명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고, 자칫 현정권의 도덕성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그에게 쏠린 국민들의 관심은 매우 높다.‘우광재, 좌희정’2002년 2월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한 후 권력의 언저리에서 오가던 농반진반의 말이다. ‘우광재’는 이광재 의원을 지칭하는 것이고, ‘좌희정’은 안희정 전 새천년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광재 의원을 말할 때 안희정 부소장을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들이 현정권의 탄생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는 점 때문이다. 세칭 386세대의 리딩기수로 주목받은 두 사람은 노 대통령의 성공에 밑거름 역할을 한 점은 부인하기 힘들다.

안희정씨는 노무현 대통령이 민주당 경선에 나섰을 때 선거캠프의 안살림을 책임지는 행정지원팀장을 맡았고, 이후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뒤 인수위 시절 당선자 비서실 정무팀장을 지냈다. 이광재 의원도 노무현 대통령 후보 기획팀장을 맡아보면서 그야말로 최측근 역할을 해냈다. 두 사람은 노무현 정권의 핵심 코드인 386을 이끈 주인공들이다.그러나 두 사람의 그 이후 행보는 전혀 달랐다. 안희정씨는 이른바 ‘썬앤문’사건과 함께 치명적인 정치적 타격을 입고 지금은 야인으로 정가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 그의 입을 빌리면 썬앤문 사건 이후 노 대통령과는 통화조차 못했다. 그의 몰락에 대해 일각에서는 ‘386의 주축인 연고대 파워게임에서 패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없지 않다.

‘우광재’, ‘좌희정’으로 불려

반면 이광재 의원은 다른 길을 갔다. 이 의원은 노 정권 출범 초기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으로 화려하게 정치적 입성에 성공했다. 그러나 호사다마였을까. 그 역시 수많은 의혹과 사건에 연루되면서 자칫 나락의 낭떠러지에 곤두박질 칠 뻔 했다. 그렇지만 그는 2004년 총선에서 금배지를 달면서 정치적 부활의 기반을 마련했다.이렇게 부활의 날갯짓을 하던 이광재 의원이 또 하나의 덫에 걸린 듯하다. 한국철도공사(옛 철도청)의 러시아 사할린 유전개발 투자와 관련, 그가 사업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물론 조사를 맡은 감사원은 이 의원의 연루가능성에 ‘근거가 없다’는 입장이다.

이 의원 역시 “나를 팔았다”며 연루설을 부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번 사건은 그의 정치적 입지에 큰 타격을 줄 개연성이 충분해 보인다. 진실과는 관계없이 그가 이 사건과 관련해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만으로 이 의원의 개인 홈페이지에는 의원사퇴를 촉구하는 글이 도배를 하고, 심지어 참여정부의 ‘개혁정책’까지 싸잡아 비판하는 등 격한 감정을 담은 네티즌 글이 넘쳐나고 있다. 최대의 정치적 위기에 직면한 노무현 정권의 황태자 이광재 의원. 그의 이력은 영광 만큼이나 간단치 않았다. 이 의원은 1965년 2월 28일생(양력)으로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천변리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그는 강원도내 명문고인 원주고를 졸업한 뒤 연세대 화공학과를 나왔다. 그는 김우식 대통령 비서실장의 화공과 직속 후배이기도 하다.

그가 정가 주변으로 접근하게 된 것은 연세대 재학 시절이던 1987년 경찰의 수배를 피해 부산으로 갔다가 그 곳에서 노 대통령을 만나게 된 것이 계기였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노동계 변호사로 활약하고 있었고, 그 후 노 대통령이 정치에 입문하면서 보좌관으로 동행했으니 노 대통령의 정치행보와 초기부터 함께 한 참모라고 할 수 있다.민주당에 입당한 그는 1992년 민주당 전문위원을 지냈고, 1995년에는 조순 서울시장 선거대책위 기획실장을 맡기도 했다. 그의 이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은 2002년이었다. 민주당 대통령 경선에 나선 노무현 후보의 선거단 기획팀 팀장을 맡은 그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고, 이후 경선에서 승리한 이후인 2002년 5월부터 2002년 12월까지 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선거캠프를 사실상 진두지휘하는 기획팀장을 지냈다.

대통령직 인수위 시절에는 대통령당선자 기획팀장을 맡았고, 노 대통령이 청와대에 입성한 이후에는 대통령비서실 국정상황실 실장으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그는 선거 때는 주로 대학교수 등 외부 그룹과 정책개발, 선거기획 등을 도맡아 해냈다. 노 대통령이 가장 신임하며 조언을 구하는 핵심 참모라는 점 때문에 주변의 질시어린 시선도 받았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 주변에서는 “노 대통령이 이광재 말만 듣는다”라는 불평도 나왔고, “초기 청와대 인선도 이광재의 작품”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국정상황실장 시절에는 노 대통령이 다른 수석들을 제쳐놓고 이 의원을 불러 “경제, 사회 등 테마별 국무회의는 어떻게 하면 좋으냐”라고 물었을 정도였다.그래서인지 그에게는 청와대 입성 초기부터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청탁성 전화도 쇄도했고 음해성 루머도 끊이지 않았다.

그를 중심으로 청와대 내부의 알력설이 불거진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열린우리당 의장이 된 문희상 의장이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재직할 당시 두 사람간에 빚어진 신경전은 아직도 정가에 회자되는 얘기들이다.이광재 의원의 시련은 2002년 대선 당시 한 기업인으로부터 받은 선거자금이 나중에 불거지면서 본격적으로 막이 올랐다. 대선 당시 썬앤문 문병욱 회장으로부터 1억500만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 및이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은 노무현 대통령의 도덕성에도 치명타를 입혀 현정부 초기에 상당한 부담을 안겨주었다. 결국 이 사건은 법정에서 그에게 벌금 3천만원에 추징금 500만원을 선고하면서 일단락되었다.

썬앤문에 1억 5천 받아 곤혹

이 사건으로 이 의원은 청와대에서 나와야 했다. 당시 그는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을 맡아 권력의 최고 핵심에서 맹활약했다. 청와대를 떠난 그는 한동안 야인생활을 했다. 그러던 그의 화려한 재기는 2004년 총선이었다. 그는 열린우리당의 강원도 태백·영월·평창·정선 지역구에서 당당히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정치적 새 출발을 한 것이다.그는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나름대로 의정활동에 열심이었다고 한다. 언제까지나 ‘노무현 대통령의 최측근’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정치인으로 생존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그는 지역구를 가꾸고 의정활동을 활발히 하는데 집중했다.

그것만이 자신의 정치 생명선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리라. 그러던 그에게 이번 사건은 그야말로 치명적일 수 있다. 물론 진실여부가 가려져 오명을 벗을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에게 여전히 남아 있는 ‘우광재’라는 단어는 향후 그 자신의 정치행보에 걸림돌로 남아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이번 사건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사실 이번 사건은 그가 연루된 의혹이 제기되지 않았다면 철도공사의 터무니없는 경영과실쯤으로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의 이름이 언론에 오르내리는 순간, 사건은 확대일로로 치달았고 결국 야당이 국정조사 방침까지 내놓기에 이른 것이다.

“언론에 내 이름이 오르내린 순간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그는 이번 사건이 터진 직후 자신의 홈페이지에 이렇게 글을 올렸다. 어쩌면 그의 이같은 탄식은 솔직한 고백인지도 모른다. 2002년 이후 화려하게 권력의 중심에 입성했고, 꿈에도 그리던 금배지를 가슴에 단 그였지만,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알 수 없는 그 무엇인가에 대한 불안감은 지울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권력자의 주변에 불나방처럼 몰려드는 이해관계자들의 유혹에 항상 노출되어 있는 한 젊은 ‘힘있는’ 인물의 번민이 그의 홈페이지에 올려진 글에서 그대로 느껴져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이인철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