섀튼의 결별선언…황우석 발목잡기 우려
“국민들은 의혹을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2005세계기술네트워크(WTN) 생명공학상을 수상한 황우석 교수가 17일 새벽 KE012편으로 귀국했다. 황교수는 섀튼의 갑작스런 결별선언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듯했지만, 침착하게 자신의 연구과정에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밝혔다. 지난 12일, “난자 취득과정의 윤리적인 문제로 황교수와의 공동연구를 그만둔다”는 섀튼 교수의 폭탄선언은 충격 그 자체였다. 섀튼 교수는 황교수의 전폭적인 지지자이자, 공동연구원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실제로 지난해 10월, 섀튼 교수는 황교수의 연구를 “망치는 살인도구로 쓰일 수도 있지만, 적절하게 쓰면 집을 짓는 도구로 이용된다”는 말에 빗대어 윤리성 논란을 일축시키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섀튼의 돌변한 행동은 황교수에게 납득할 수 없을뿐 아니라, 앞으로도 갈길이 먼 황교수팀의 연구에 적잖은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을 터. 그동안 황 교수의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둘러싼 윤리적 논쟁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논란의 핵심은 황 교수팀이 어떻게 난자를 채취했으며, 확보할 수 있었는지로 요약된다. 즉, 연구에 사용된 난자를 채취하는 과정에서 법적,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었는지에 관한 것이다.황 교수는 난자취득 과정에 대해 “연구 취지에 동참한 여성들의 순수 기증에 의해서”라고 밝혔지만, 이 문제는 연구발표때마다 어김없이 불거져 나오곤 했었다. 난치병 치료의 유일한 희망으로 불리는 인간배아줄기세포 배양에 성공해 세계적인 생명공학자의 대열에 오른 황우석 교수. 그는 세계의 내로라하는 생명공학자들도 실패를 거듭한 연구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내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다.
소를 사랑했던 가난한 파래골 소년
그러나 황교수의 인생은 현재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만큼 고단한 삶의 연속이었다. 그가 여기까지 오기에는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시련이 있었다. 즉 그의 삶은 가난과 역경을 뛰어넘어 한길을 우직하게 걸어온 ‘황소 정신’의 승리라 할 수 있다.황교수는 1952년 충남 부여군 은산면에 위치한 계룡산의 한 자락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마을 이름은 ‘파래골’. 산과 계곡이 온통 푸른 자연으로 둘러싸인 ‘파란 마을’이라는 뜻이다.황교수의 어린시절은 몹시 가난했다. 설상가상으로 그가 다섯 살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넉넉한 집안에서 시집온 황교수의 어머니는 중풍으로 15년간 누워있는 할아버지와 4남매를 돌보는 실질적인 가장역할을 해야했다.
변변한 땅 한 마지기 없던 황교수의 집에서 ‘소’는 유일한 생계 수단이었으며 황교수에게 유일한 친구이자 희망이었다. “방과후에는 소를 끌고 둑방으로 나가 소와 대화하며 수의사의 꿈을 키웠다”는 그의 말에서 당시 그에게 소가 얼마나 큰 존재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그렇다고 그가 소를 데리고 한가로이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하면 오산. 손이 귀한 농촌에서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집안일을 거들어야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자신의 일감에서 눈을 떼지 않는 우직한 성격에서 붙여진 그의 별명은 ‘찍소’. 이렇듯 어릴 때부터 소와 ‘동고동락’해야 했던 그의 생활환경은 그가 막연하게나마 수의사의 꿈을 키우게 하는 중요한 배경으로 자리잡게 된다.
서울의대 마다하고 수의학과 진학
자신의 꿈을 향한 황교수의 전진은 중학교 진학을 계기로 좀 더 박차를 가하게 된다. 당시 작은 시골마을에서 중학교에 진학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상급학교로의 진학은 집안에 적잖은 부담이 되었기에 그것은 일부 특혜받은 이들만 누릴 수 있는 ‘사치’였던 셈.황교수는 그 마을에서 중학교에 진학한 유일한 학생이었다.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그가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던 것은 6·25때 인민위원장을 지낸 전력으로 황교수의 다락방에 2년여간 숨어지낸 집안 당숙의 후원때문에 가능했다. 3년간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대전서중에 진학한 후에도 집안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당시 차비 12원이 없어 고향에도 1년에 두 번밖에 가지 못했을 정도였다는 것이 황교수의 말이다. 그것은 대전고에 진학해서도 마찬가지였다.특이한 것은 그가 처음부터 우등생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첫 시험 성적은 480명 중 400등으로 하위권에 속했다. 특히 생물성적이 수우미양가 중 ‘미’였다는 것은 세계적인 생명공학자로 우뚝선 그의 현재와 매치가 안되는 부분이다.그러나 ‘찍소’다운 황교수만의 뚝심은 이때부터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이대로 가다가는 자신의 꿈인 수의사가 될 수 없다는 일종의 위기의식을 느낀 것이다. 그는 친구들과 ‘등 안대기 클럽’을 만들어 공부에 매진했다. 말그대로 방바닥에 등을 대지 않고 공부에 매달리겠다는 각오로 만든 모임이었다. 그 결과 3학년때 그의 성적은 전교 21등. 서울대 의대를 가고도 남는 성적이었다. 그러나 황교수는 의대를 포기하고 과감히 수의학과를 선택했다. “서울대 의대만 나오면 부잣집 처녀들이 줄을 설텐데 고집을 부리는 이유가 뭐냐. 집도 찢어지게 가난한 놈이 어쩌려고 이 고집이냐”는 담임선생의 질책과 온갖 회유도 소용없었다. 그는 끝까지 소신을 굽히지 않고 1.2.3 지망 모두 서울대 수의학과에 원서를 냈고, 그것은 지금의 황교수를 있게 한 밑거름이 되었다.
교수임용 탈락이 전화위복
누구나 부러워하는, 또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서울대에 입학해 수의학 박사학위를 딴 후 연구원 생활을 하던 1981년. 그는 커다란 시련을 겪게 된다. 자신에게 돌아올 전임강사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뺏긴 것이다. 교수임용에 낙방한 황교수는 3년간이나 다른 대학의 시간강사 자리를 맡아 전전하는 고단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전화위복이라 했던가. 이 일은 황교수의 인생을 바꿔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교수임용에 탈락한 후 자의반 타의반으로 택할 수밖에 없었던 연구원 생활은 그가 복제연구에 발을 들여놓게 만든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한 것이다.
일본 홋카이도대에서 객원 연구원으로 생활하던 84~86년은 그의 인생의 최대 전환점이 된 시기다. 이 시기에 그는 세계적인 인공수정 전문가들과 교류하면서 가축 번식기술을 익힌 뒤, 동물의 유전자 조작과 인공번식 연구에 전념했다. 이것이 안락한 교수자리에 정착했을지도 모를 그가 복제분야의 일인자로 탄생하는 첫 시작이었다. 황 교수 역시 “그때 교수 임용에 탈락한 것이 내 인생에 있어 최대 전환점이었다. 젊은 나이에 서울대 교수가 됐으면 자만에 빠졌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역경에 실망하거나 굴하지 않고, 그것을 오히려 값진 기회로 만들어내는 그의 우직함과 성실한 인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영롱이’로 이름 알리다
1986년 드디어 서울대학교 수의학과 교수로 부임한 황교수는 동물복제 연구에 더욱 박차를 가한다. 혼과 열을 다해 연구에 매달린 결과는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1999년 2월, 한국 최초로 체세포 복제 송아지 ‘영롱이’가 탄생한 것이다. 밤낮 가리지 않고 연구실에 틀어박혀 수천, 수만번의 똑같은 실험을 한끝에 이뤄낸 성과였다. 동물 체세포 복제로 세계에서 5번째, 젖소 복제로는 세계 최초인 영롱이의 탄생은 황교수의 이름을 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이후 그의 연구에는 브레이크가 없었다. ‘영롱이’로 세상을 놀라게 한지 불과 한달 후 탄생한 복제한우 ‘진이’는 그를 세계 복제연구의 주요인물로 각인시켰다. 황교수는 이어 2000년에는 소 난자에 호랑이의 체세포 핵을 이식해 사자를 대리모로 쓴 백두산호랑이 복제에 도전했다. 이 실험은 비록 출산에는 실패했지만 세계 최초로 이종(異種) 동물의 핵 이식으로 임신까지 성공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특히 2004년 2월, 각종 난치병을 치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 세계최초 ‘인간배아 줄기세포’의 발명은 전 세계를 놀라게 만드는 동시에 한국의 생명공학 기술을 알리는 데 공헌했다.
‘찍소’에게 좌절이란 없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말이 있다. 지금의 황교수를 있게 한 것은 하루 5시간의 수면도 아까워하는 그의 부지런함과 끈기였다. 그의 하루는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한 시간 동안 명상을 하며 심신을 가다듬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후 도축장으로 달려가 실험에 사용할 수백개의 신선한 난소를 가져와 오전 7시부터 바로 실험에 들어간다. 그리고 이 실험은 밤늦게까지 혹은 그 다음날까지 이어진다. 낮밤을 가리지 않고 실험을 계속하는 황교수에게는 주말도 휴가도 ‘사치’일 뿐이다. 수천, 수만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같은 실험에 매달려야 하는데서 오는 스트레스는 이 길을 택한 연구원들이 짊어지고 가야할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연구가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은 연구원들에게 가장 무거운 부담으로 작용하기 마련. 그러나 황교수는 특유의 뚝심과 끈기로 연구를 계속했고, 마침내 생명공학계의 거장들도 해내지 못한 쾌거를 이뤄냈다.앞만 보고 달려온 황우석 교수에게 지금은 최대 위기임이 틀림없다. 일각에서는 세계 생명과학계에서 섀튼 교수가 차지하는 영향력이 적지 않다는 점을 감안, 앞으로 황교수팀의 연구에 차질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얼마전 국내에서 발생한 난자 불법매매사건은 황교수에게까지 불똥이 튀었다. 황우석 사단의 일원으로 알려진 한 불임클리닉의 이사장이 ‘불법매매난자를 이용한 인공수정 시술’을 인정하는 발언을 함으로써, 황교수의 연구는 또한번 격렬한 윤리논쟁에 휩싸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파래골’에서 태어나 자란 가난한 시골소년의 인생은 처음부터 평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수많은 시련과 역경으로 점철된 그의 인생 여정은 현재의 그를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그에게 실패는 다시 한번 도전할 수 있는 기회였고, 모진 역경은 성공을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었다.또다시 뜨거운 윤리논쟁에 휘말린 황우석 교수. 그가 현재의 위기를 이겨내고 오랜 염원이던 줄기세포를 이용한 불치병 환자의 완치를 이뤄낼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이수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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