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범죄 피해가 발생하고 시간이 한참 흐른 뒤 가해자를 고소하면, 가해자가 처벌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최근 몇 년간 전 세계에 불어온 미투운동의 열풍은 우리나라에서도 뜨거웠다. 유명 인사들이 겪은 성범죄 피해 사실을 폭로하거나, 혹은 유명 인사들로부터 성범죄 피해를 본 사람들이 용기를 내어 피해 사실을 세상에 알렸다. 덕분에 자칫 묻힐 뻔했던 추악하고 파렴치한 사건들이 고스란히 드러나게 되었고, 성범죄에 관한 사회적 인식도 많이 개선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유명인뿐 아니라 대중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변호사로 형사 성범죄 사건들을 진행하다 보면, 피해자가 미투 운동을 보고 고민 끝에 고소 결심을 했다는 진술도 자주 볼 수 있다.
그런데 미투 운동은 그 특성상 성범죄의 범행 시점과 고소 시점 사이에 시간적 간격이 크기 마련이다. 묻어뒀던 과거의 피해 사실을 끄집어내는 것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미투 때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성범죄 피해를 당한 지 몇 달 혹은 몇 년이나 지난 뒤에 가해자를 고소하는 사건을 상당히 많이 접한다.
원칙적으로 공소시효가 지나지 않았다면 몇 년이 지났더라도 성범죄 피해 사실에 관해 고소하는 것이 가능하고, 이론상 처벌도 당연히 가능하다. 문제는 실질적으로 처벌 가능성이 얼마나 되느냐는 것이다.
사건 발생 후 많은 시간이 흐른 뒤 고소가 이뤄지면, CCTV나 통화 문자 기록 등 중요한 증거들이 이미 사라져버렸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상황이 고소인과 피고소인 중 누구에게 유리할까?
중요 증거들이 없으면 고소인이나 수사기관도 피해 사실을 증명할 증거가 부족하므로 혐의 입증에 어려움을 겪지만, 피해자인 고소인의 진술이 그 자체로 증거가 된다. 한편 수사기관은 “왜 피해 직후 고소하지 않고 이제야 고소하는지?”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고, 혹시 무고는 아닌지 검토하게 된다. 물론 보통 성범죄 피해자의 고소에는 생각 이상으로 큰 결단이 필요하기 마련이므로, 이러한 점을 진술한다면 큰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다.
반면 피고소인 측에서는 사건 발생 후 시간이 많이 흐른 뒤 들어온 고소는 악몽 그 자체다. 가해자는 잊고 지냈던 사건이 다시 목을 조여오는 느낌을 받으며 죗값을 치르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고소인이 피고소인을 무고했거나 혹은 사람이나 행동을 착각·오해하여 고소하는 등 피고소인이 뜻하지 않은 혐의를 받게 되는 경우다.
이러한 사건은 가장 골치 아프고 어렵다. 사건 직후 고소를 당했다면 얼마든지 유리한 증거들을 확보해서 억울함을 증명할 수 있었을 텐데, 자신의 결백함을 입증할 결정적인 무기들이 이미 다 사라져버린 뒤기 때문이다. 반면, 앞에서 말했듯 고소인의 일관된 진술은 그 자체로 증거가 되기 때문에 피고소인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 여러모로 불리하다.
사실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르면 이렇게 증거가 부족할 경우 무죄가 선고되어야 하는데, 성범죄 등 몇몇 범죄에서는 그렇지 않은 일이 대부분이다. 애초에 사건 발생 장소가 대개 모텔이나 집 등 사적인 공간이므로 물적 증거가 남기 어렵기 때문에 피해자의 진술이 굉장히 중요한 증거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조금 과장하면 성범죄에서는 실질적으로 피고인이 오히려 무죄를 적극적으로 입증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에 ‘유죄 추정의 원칙’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그렇다고 무죄 추정의 원칙을 엄격하게 적용해버리면, 대부분의 성범죄자는 구조적으로 처벌되기 힘들 것이다. 난감한 일이다.
사건 발생과 고소 시점 간 간격이 큰 사건은, 대개 이처럼 악몽의 영역에 놓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해당 상황이 억울한 피고소인은 일관되게 범행을 부인하면서, 관련 사건 경험이 풍부한 변호인의 조력을 받아 최대한 구체적으로 당시 상황을 진술하는 한편 조그마한 정황증거라도 찾아내 무죄 입증에 활용하는 수밖에 없다. 장기적으로 입법 보완과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영역이다.
김지훈 변호사 ily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