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바꾼 ‘한 통의 전화’
여성계 지도자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 계기는 김대중 전대통령의 전화 한 통이다. 새천년민주당 창당 당시 발기인으로 참여해 줄 것을 직접 제의받은 것. 이후 2000년 총선 비례대표에 당선됐다. 정치권 입문 이후 한 내정자는 행정부 경력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2001년 초대 여성부장관에 임명된 것이다. 참여정부 첫 환경부 장관에도 발탁됐다. 감사원 부정방지대책위원, 환경처 환경보전대책위원, 통일부 정책자문위원, 참여연대ㆍ방송개혁국민회의 공동대표 등 정부자문 및 민간분야의 다양한 경험도 한 내정자의 큰 정치적 자산으로 꼽힌다. 게다가 그는 이미 재선의원이다. 여권의 여성 지도자 가운데 국정경험이 가장 풍부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유다. 여당 여성의원들은 한 내정자의 총리 인준과 관련해 “두 번씩이나 장관을 지낼 만큼 그의 국정운영 능력은 이미 검증을 받았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성공한 정치인이다. 남성 정치인 사이에서도 두 번씩이나 장관을 지낸 인사는 흔치 않다. 그러나 그를 대변하는 화려한 이력만으로는 한 내정자의 삶의 궤적과 정치적 고뇌를 다 설명할 수 없다는 게 지인들의 설명이다. 그의 고향은 평남 평양이다. 거기서 5년을 살았다. 그러나 그의 나이 다섯살에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한 내정자는 자서전에서 “평양이 나의 고향이라는 기억보다는 부모님이 가슴에 저미고 살아온 고향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렇다면 언제 여성운동계 대모로서 성장할 ‘끼’를 발휘했을까. 그는 고백한다. “대학을 졸업하기 이전까지 현실과 세상물정에 까마득하게 눈먼 청맹과니였다. 보들레르와 베를레느를 읊조리는 불문학도였으며 아름다운 생을 노래하는 작가가 되고픈 여리디 여린 감성을 지닌 너무도 평범한 문학소녀였다.”
사회주의자로 몰려 ‘곤욕’
한 내정자의 인생의 전환점은 현재의 남편 박성준(65) 성공회대 교수를 만났을 때다. 이화여대와 서울대의 기독교 학생연합단체 ‘경제복지회’에서 만난 그들. 한 내정자는 “남편을 통해 시대의 아픔과 사회의 현실에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경제복지회’는 성서를 통해 현실과 사회 전반적인 문제에 대해 연구하고 토론하는 대학생 연합단체였다. 67년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신혼의 단꿈도 잠시. 68년 7월 박 교수가 ‘통혁당 사건’에 연루돼 구속됐다. 한 내정자와 박 교수의 ‘옥중서신’은 못 다한 사랑과 시대의 아픔으로 얼룩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한 내정자는 점점 더 강하고 맹렬한 투사로 변모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본격적으로 민주화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70년 이화여대 사감을 지낸 그는 학생들의 시위를 지원하다 직장을 옮겼다. 새로운 직장은 바로 한국크리스천 아카데미. 그곳에서 한 내정자는 여성 프로그램을 담당했다. 당시의 인연은 한국 진보 여성운동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79년 박정희 정권 말기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으로 구속됐다. 죄명은 ‘국가보안법’ 위반, 한 내정자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나는 아직도 가끔 하나님께 나를 고문했던 그들을 진정으로 용서해 달라고 기도를 드린다. 하지만 아무리 짓이겨도 지워지지 않는 문신처럼 고문의 기억은 여전히 내 상념의 어두운 한 모서리에 우두커니 숨어 있다. 난 결국 고문에 의해 ‘사회주의자’가 되고 말았다.” 요란한 총소리가 울렸던 80년 광주, 광주교도소 여성 정치범은 한 내정자 뿐이었다.
마침내 찾아온 ‘봄’과 함께 그는 81년 8월15일 광복절에 특사로 석방됐다. 2년 6개월만이다. 교도소 경험 이후 한 내정자의 생각은 바뀌어 있었다. 남편의 석방운동을 시작했다. 시인 김지하의 도움으로 지학순 주교를 소개받았다. 81년 12월25일 13년 6개월만에 남편을 다시 만났다. 스물일곱 청년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마흔 한 살의 중년의 모습으로 나타난 남편. 남편의 석방을 계기로 한 내정자는 진보적 여성운동의 조직화에 나서게 된다. 그는 이화여대 여성학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재야는 ‘나의 숙명’
한 내정자는 마흔이 넘어 아이를 갖게 된다. 여기서도 한 내정자가 실천하고자 했던 여성운동의 한 단면이 드러난다. 남편과의 상의 끝에 부모의 성을 모두 출생신고서에 올리기로 했다. ‘박한’이 성이요, 이름은 ‘길’. 동사무소가 발칵 뒤집혔다. 새로운 성을 만들 수 없다는 것. 결국 ‘박한 길’을 ‘박 한길’로 등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한 내정자의 아들의 이름은 ‘길’이다. 전두환 군사정권 말기인 87년 2월, 한국의 진보적 여성운동은 민주화운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국 21개 민주여성단체와 연합해 ‘한국여성단체연합’을 결성하게 된다. 87년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당한 물고문 치사 사건 직후 그 해 6월,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대규모 시위가 거리를 뒤덮고 있었고, 한 내정자와 남편도 매일같이 시위에 참여했다. 한 내정자가 여성단체연합의 대표로 일할 때 자신이 하는 일을 “‘쓰레기통에서 통일까지’라는 한 마디 말로 압축하여 표현하곤 했다”고 그를 아는 사람들은 전한다.
그리고 그 말을 실천해내려고, 새롭게 제기되는 수많은 문제에 대해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항상 뛰어 다녔다고 한다. 정치권에 입문한 후 초대 여성부 장관에 발탁된 그는 여성발전기본법 개정, 여성채용 불평등 기업에 대한 여성부의 직권조사 강화. 각부처 ‘여성정책 책임관’ 도입, 여성정보종합 Women-NET 구축, 영·유아 보육 및 방과 후 보육정책 수립, 긴급전화 1366을 개설하는 등 여성계의 오랜 숙원사업을 국가 정책에 반영해 나갔다. 투사적 강단은 의정활동에서도 묻어난다. 콘돌라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의 “(폭정의 전초기지라는) 북한 정권의 성격은 자명하다”는 내용의 발언과 관련, 그는 “라이스 장관의 발언은 모처럼 조성된 6자회담 재개의 긍정적 분위기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부적절한 행동”이라면서 “한미 외교채널을 통해 적극적인 시정을 요구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당 의원이 미 국무장관의 발언에 대해 문제점을 지적하고, 정부에 시정을 촉구한 것은 아주 이례적인 일로 기록됐다.
홍사덕 주저앉힌 ‘승부사’
스스로 ‘국가보안법’의 피해자였기에 한 의원의 국보법 폐지에 대한 생각도 확고하다. “국보법은 독재정권 유지를 위해 역사를 바로 이끌고자 하는 양심세력을 무참히 잘라냈다. 이쯤에서 폐지해야 한다.” “한나라당식으로 하면 하바드 미 대사는 이적행위를 했고 미 국무성은 이적단체란 말인가. 박근혜 대표도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다. 자기가 원해서 만나면 정당하고 다른 사람이 만나면 범죄라는 자가당착적 사고방식 아닌가.” 2004년 국가보안법 폐지안을 공동발의한 그는 2005년 과거사법 표결 때는 “당초 여당안보다 내용이 후퇴했다”며 기권하기도 했다.이처럼 재야의 성향은 한 내정자의 정치적 근간을 이룬다.그럼에도 여권 어느 계파도 그를 배척하지 않는다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다.
청와대가 한 내정자를 낙점한 데는 당 지도부의 요구가 컸다. 정동영 의장은 한 내정자를 포함해 문희상 김혁규 의원을 후보군에 포함시켜 청와대에 전달했다. 여성학자이자 방송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오숙희씨는 어느 글에서 한 내정자를 “정의롭고 따뜻한 세상을 바라는 욕심 때문에 오지랖이 넓을 수밖에 없는 사람, 군림하지 않으면서 리드할 수 있는 사람, 어떤 경우에도 자기를 믿어준 마음들을 저버리지 않는 사람,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달려가 안기고 싶은 사람”이라고 평했다. 온화함 미소 뒤에 숨은 탁월한 ‘조정능력’은 그의 장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지난 해 ‘문희상 체제’ 유일한 여성 상임중앙위원으로 선출됐을 당시 ‘완충지 역할’을 맡을 것으로 기대가 모아지기도 했다.물론, 이는 참여정부 ‘책임총리’ 역할에 있어 한 내정자에 대해 우려와 기대가 엇갈리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전임자인 ‘실세총리’ 이해찬 전총리가 구축한 분권형 국정운영 기조를 유지하는 데 있어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 이에 대해, 여성민우회 시절부터 한 내정자와 동고동락해온 박진경 열린우리당 우리여성리더십센터 전문위원은 “두 번씩 장관을 지냈다는 것은 이미 국정운영의 검증 단계를 거친 것이나 다름없다. 또 장관 재직 당시 부처 장악력이 합격점을 웃돌았다”면서 “한명숙 총리 내정자는 여성계의 오랜 바람인 여성의 고위직 모델, 양성평등 사회로 나아가는 세계적 추세의 연장선상에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전했다. 게다가 여권 일각에선 17대 총선 당시 고양 일산갑에서 국회부의장을 지낸 5선의 한나라당 홍사덕 전의원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만큼, ‘승부사’적 기질도 갖고 있음을 지적한다. 헌정사상 첫 여성 총리로 가는 시험무대에 선 한 내정자, 다가올 인준 청문회가 기다려진다.
# 여성 총리’ 담금질의 역사
4년 전 김대중 정부 시절, 최초의 여성 총리 탄생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장상(67) 전이화여대 총장이 그 주인공. 그러나 총리 인준 청문회 과정에서 낙마하고 말았다. 이중 국적문제가 큰 이유였다. 장 전총장은 참여정부 여성 총리 기용 가능성과 관련해 최근 자신의 심정을 밝혀 주목을 끌었다.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 “4년 전만해도 ‘여성이 총리?’ 라고 하면서 여성이 총리까지 하느냐고 생각했지만, 이젠 (여성 총리가 거론돼도) 아무도 놀라지 않는데 이게 발전”이라고 말했다.
한편 민주당에 입당, 선거대책위원장으로서 지방선거를 이끌고 있는 장 전총장은 “총리 임명자는 당적을 버려야 한다”는 한나라당 요구와 관련해서도 “책임정치 차원에서 반드시 그래야 하나 의문”이라며 “그 위치에선 당적이 있든 없든 공정하고 객관적인 조정 능력을 발휘해야 하니 당적 유무는 상관없는 문제”라며, 한 내정자의 총리 임명에 긍정적인 시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신인령(63) 현이화여대 총장 역시 참여정부 총리 인선 때마다 하마평에 올랐던 인사다. 고건 전총리의 후임 인선 과정은 물론, 이번에도 물망에 올랐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신 총장 자신이 정치입문을 고사했다고 알려진다. 신 총장은 한 내정자와도 인연이 깊다. 이화여대 동문인 이들은 79년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 당시 이우재 전의원, 김세균 서울대 교수와 함께 연루된 바 있다.
이금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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