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향한 성난 민심에 숟가락 얹으려다 뭇매 맞는 지방정부들
日 향한 성난 민심에 숟가락 얹으려다 뭇매 맞는 지방정부들
  • 조택영 기자
  • 입력 2019-08-08 17:11
  • 승인 2019.08.08 17:33
  • 호수 1319
  • 21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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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시민운동에 관(官)이 왜 개입하나” 시민들 분노
서울 중구청의 노 재팬 배너기가 대한문 일대에 내걸리고 있다.
지난 6일 오전 서울 중구청의 노 재팬 배너기가 대한문 일대에 내걸리고 있다.

[일요서울 | 조택영 기자] 지난 6일 서울 중구청이 시민들의 거센 반대와 우려에도 불구, 일본의 화이트리스트(백색국가수출절차 간소화 우대국 명단)’ 한국 배제 결정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도심 한복판에 일본 보이콧을 알리는 노 재팬(NO Japan) 배너기를 내걸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중구청만의 일이 아니다. 서울 자치구, 전국 기초자치단체 및 지방자치단체 등도 경쟁하듯이 일본 규탄 행사를 열고 있다.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시작된 일본제품 불매운동을 관()이 주도하려는 모습을 보이면서 본래 취지가 퇴색할 수 있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일부 시민들은 시민운동에 무임승차해 금배지 달려고 하나”, “민심으로 정치질 하지 마라등의 강도 높은 비판까지 내놓은 상황이다.

불매운동 본래 취지 퇴색 양상···무임승차해 금배지 달려고 하나

지난 6일 서울 중구청은 시민들의 잇단 우려와 반발에도 불구하고 일본제품 불매와 일본 여행 거부를 뜻하는 (보이콧) 재팬-NO(Boycott) Japan : 가지 않습니다 사지 않습니다(이하 노 재팬)’ 배너기를 설치 강행했다.

오는 15일 제74주년 광복절을 맞아 태극기와 불매운동을 뜻하는 노 재팬 배너기를 함께 달기로 한 것이다.

퇴계로, 을지로, 태평로, 동호로, 청계천로, 세종대로, 삼일대로, 정동길 등 관내 22개로에 태극기와 노 재팬 배너기 총 1100개를 지난 6일 오전부터 설치하기 시작했다.

중구청이 설치를 예고했던 지난 5, 이미 시민들의 반발은 거셌다. 민간이 주도하는 불매운동에 관이 왜 개입하냐는 것이다. 관의 개입으로 본래 취지가 퇴색되는 등 부작용이 커질 것이라는 우려가 속출했다. “일본 시민 및 관광객을 아베 정권과 동일시해서 비난하면 안 된다는 비판도 함께했다. 한국이 좋아서 찾은 일본 관광객들이 불쾌해 하고, 일본의 무역 도발에 찬성하는 일본 시민이 더욱 증가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불매운동은 국민 몫

그러나 서양호 중구청장은 지난 6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이하 SNS)왜 구청은 나서면 안 되냐. 왜 명동이면 안 되냐. 일에는 다 때가 있다. 지금은 화이트리스트 배제조치라는 경제보복이 터져서 대통령조차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고, 국회에서는 지소미아 파기가 거론되고 있다고 썼다.

이어 이런 판국에 캠페인과 운동에, 정치인과 지방정부는 빠져야 하고 순수한 민간만 필요하다는 주장에 동의하기 어렵다. 이미 수많은 국민은 정치인과 150여 개의 지방자치단체가 이 싸움을 함께 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금은 모든 국민이 하나의 목소리를 내서 대통령과 정부가, 향후 있을 협상과 외교에서 쓸 수 있는 카드를 여러 장 만드는 것이 필요한 시기라며 그때까지 중구의 현수기는 대장기를 지키며 국민과 함께할 것이라고 했다.

6일 서울 중구청 홈페이지에 노 재팬 배너기 설치를 중단하라는 의견이 빗발치고 있다. [사진=서울 중구청 홈페이지 캡처]
지난 6일 서울 중구청 홈페이지에 노 재팬 배너기 설치를 중단하라는 의견이 빗발쳤다. [사진=서울 중구청 홈페이지 캡처]

시민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중구청 홈페이지 참여마당에는 비난성 글이 잇따랐다. “무슨 인기를 끌어보려고 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지금이라도 배너를 걷기 바랍니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관 주도의 이런 짓을 바라지 않습니다”, “압도적인 비난 여론에도 관의 이름세금으로 이렇게 (설치를) 강행해도 되는 것이냐”, “금배지 달고 싶어서 이참에 이름 좀 알리고 싶으신가 보다”, “불매운동은 국민들이 알아서 잘 한다”, “일본인 관광객에게 공포감을 조성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안 된다등의 비난이다. 배너기를 내리라는 청와대 청원도 등장했다.

중구청은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반나절 만에 노 재팬 배너기 철거를 결정했다. 서양호 중구청장은 지난 6일 오후 SNS배너기를 내리도록 하겠다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그는 일본정부의 경제보복에 국민과 함께 대응한다는 취지였는데 뜻하지 않게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하다중구청의 노 재팬 배너기 게첩이 일본 정부와 일본 국민을 동일시해 일본 국민들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줄 수 있다는 우려와 불매운동을 국민의 자발적 영역으로 남겨둬야 한다는 비판에 대해 겸허히 받아들인다고 밝혔다.

이어 이유 불문하고 설치된 배너기는 즉시 내리겠다. 다시 한 번 염려하신 국민들께 머리 숙여 사과드린다고 덧붙였다.

아직도 중구청 홈페이지에는 비난성 글이 속출하고 있다. “국민이 알아서 한다”, “이미 해외 언론에 공개돼, 관 주도형 민족주의를 했다는 증거가 역사기록에 남은 셈”, “정치적 판단은 국민 개개인의 몫이다. 어떻게 일방적으로 이런 행위를 할 수 있나등의 의견이 달리고 있다.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은 일본 관광객이 많이 오는 명동 상가에 노 재팬깃발을 내걸면 당연히 일본 관광객은 줄어들고 그 불똥은 명동 상인들에게 튈 것이라며 명동 상인들에게 피해를 주는 중구청장에 대해 민주당은 엄하게 질책해야 한다. 그래야 일본 불매운동을 악용하는 정치꾼들이 줄어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본인 전체 배척, 합리적

중구만의 일이 아니다. 여러 서울 자치구도 노 재팬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서울 구로구는 지난 6일 구로역 북부광장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구민과 함께하는 일본 경제침략 규탄 결의대회를 열었다.

구로구는 백색국가 제외 결정 철회까지 특별대책본부도 운영할 방침이다. 특별대책본부는 캠페인 등을 통해 민관 공동 불매운동을 확산하는 역할을 맡는다.

문석진 서대문구청장이 지난 6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청에서 열린 '일본 경제보복조치 직원 규탄대회'에 참석해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시스]
문석진 서대문구청장이 지난 6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청에서 열린 '일본 경제보복조치 직원 규탄대회'에 참석해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시스]

서대문구는 같은 날 구청 대강당에서 일본제품 사용중지타임캡슐 퍼포먼스까지 벌였다. 직원 400여 명이 참석해 그동안 쓰던 일본산 제품을 수거해 상자에 쏟아 넣고 자물쇠를 채운 것이다. 일본이 경제보복 조치를 철회할 때까지 구청 내에서 일본산 제품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결의했다.

광진구, 서울공무원노조도 규탄대회 및 일본제품 불매운동에 동참했다. 전국 기초지방자치단체장들도 공개적으로 릴레이 일본 규탄에 나섰다.

전문가들은 불매운동 등 시민들의 자발적 영역을 관이 주도하는 것은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관은 국민과 기업이 입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에 집중해야 된다는 것이다.

또 아베 정부가 아닌 평범한 일본인을 향한 선을 넘는 반일감정은 옳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방정부들의 잇따른 일본 규탄 행동들이 자칫 일본 관광객이나 다른 외국인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 정부와 연결된 단체가 나서서 노 재팬구호를 외쳐 일본에 대한 항의 표시가 관 주도로 이뤄진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김윤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수출 규제, 무역 보복은 (아베) 정부의 정책이라면서 전범기업에 대한 불매운동은 일본 정부에 반발하는 의미로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행동이지만 한국에 있는 일본인들 전체를 배척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고 설명했다.

정부도 현재 감정적 대응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협상 노력 등도 이어가고 있지 않느냐면서 장기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상황에서 일본인에 대한 감정적 대응은 옳지 않다고 조언했다.

조택영 기자 cty@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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