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기 총리에게 내치를 맡기고 노 대통령 자신은 외치에만 전념한다는 게 책임총리제의 골자다. 노 대통령이 공언했던 이른바 2선후퇴 카드인 셈이다. 여권 주변에서는 벌써부터 ‘정몽준 총리 발탁설’이 나돌고 있다.노 대통령은 연정론을 처음 꺼낸 이후 ‘권력 이양’ ‘임기단축’ 등 충격 발언을 연일 쏟아낸바 있다. 결국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이 물건너 가면서 노 대통령의 충격 발언이 현실화될 가능성도 낮아졌다.하지만 정치권 관계자들은 노 대통령의 성격이나 정치스타일에 비춰볼 때 충격 발언 이면에는 또다른 비수가 감춰져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치밀한 계획하에 의도된 발언이지 결코 허언이 아닐 것이란 관측. 특히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카드는 누가 봐도 실현가능성이 희박했지만 노 대통령은 박근혜 대표를 청와대로 초청해 박 대표의 위상만 높여줬다.
연말 깜짝 승부수 띄운다
그렇다면 노 대통령은 왜 그런 무모(?)한 카드를 꺼내 들었고 손해보는 회동을 가졌을까. 이에 대해 정치권 관계자들은 2차 승부수를 던지기 위한 사전정지 작업으로 해석하고 있다. 즉 개헌론이나 정계개편 등 큰 틀의 정치적 승부수를 던졌을 때 예상되는 한나라당의 반발을 잠재우는 동시에 명분을 축적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란 관측.실제로 대연정 무산이후 여권 핵심부 주변에서는 민주당과 민노당, 중부권 신당세력 등 군소정당과의 소연정론이 다시 나돌기 시작했고, 권력구조 문제와 관련해서는 책임총리제가 급부상하고 있다.책임총리제는 열린우리당이 추천하는 차기 총리에게 각료 임면권 등 내치를 전담케 하고 노 대통령은 외교 안보 분야에만 전념한다는 게 기본 골자다. 프랑스식 이원집정부제에 가까운 권력구조로 실질적인 분권형대통령제인 셈이다. 노 대통령도 이미 당선자 시절부터 분권형대통령제를 주장한 바 있다.
지역구도 극복을 위한 선거구제 합의를 전제조건으로 제1당에 총리지명권을 주겠다고 약속했던 것. 연정론 정국에서 노 대통령이 충격 발언을 잇달아 쏟아 낸 배경에는 당선자 시절부터 구상했던 자신의 플랜을 실행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가 담겨 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따라서 노 대통령은 재보선 참패이후 침체된 여권 분위기를 쇄신하는 동시에 자신의 발언에 책임을 진다는 명분으로 연말쯤 특단의 카드를 꺼내들 가능성이 높다. 이런 분위기라면 내년 지방선거는 물론 “차기 대권도 물건너 간다”는 위기감도 작용하고 있을 것이란 분석에 무게감이 실리고 있다.이와 관련 열린우리당의 한 중진의원은 “노 대통령은 이미 오래전부터 국정운영 전반에 대한 마스터플랜을 짜 놓고 그 계획에 따라 일을 추진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며 “노 대통령이 준비하고 있는 다음 수는 책임총리제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책임총리제는 △연정론 돌파구 △여권 분위기 반전 △지방선거 승리 △개헌론 명분쌓기 등 일석다조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최적의 카드라고 이 중진은 덧붙였다.실제로 노 대통령은 연정정국에서 임기단축 등 적잖은 충격 발언을 쏟아냈다. 진정성 여부를 떠나 최고통치권자의 발언으로는 신중치 못했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그렇다고 한 번 내뱉은 말을 다시 집어넣을 수도 없다. 이래 저래 체면만 구겨진 상태다. 어떻게든 돌파구를 마련해야 하고 내년 지방선거와 차기 대권을 겨냥한 중장기 플랜도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다.
정몽준 카드 급부상 중
책임총리제는 이러한 암초를 한꺼번에 극복하고 정국 반전을 꾀하는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게 정치권 관계자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노 대통령 스스로 권력의 반 이상을 포기하고 2선으로 물러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국민들은 노 대통령의 용단을 높게 평가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또 총리는 내치를 전담하고 대통령은 외치에 치중하는 책임총리제가 국민적 호응을 얻게 될 경우 자연스럽게 개헌론으로 발전할 수 있다. 권력이 집중된 현행 단임제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보다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권력구조가 필요하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개헌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국민적 요구를 한나라당도 마냥 무시할 수 없을 것이란 관측에 무게감이 실리고 있다.실제로 여권 핵심부 주변에서는 책임총리제와 관련한 갖가지 시나리오가 나돌고 있다. 현 이해찬 총리를 책임총리로 재선출해야 한다는 이른바 ‘이해찬 책임총리론’이 대표적이다.
여권내 차기대권후보로 거론되고 있긴 하지만 본인은 대권에 관심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고, 무엇보다 노 대통령이 절대적으로 신뢰한다는 게 이유다. 하지만 입각한지 1년5개월에 접어든 이 총리를 다시 책임총리로 재발탁한다는 것은 신선함이 떨어지고, 여권내 잠룡인 정동영(통일부)·김근태(복지부) 장관과의 형평성 차원에서도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따라서 여권 관계자들은 노 대통령이 책임총리제 카드를 꺼내든다면 그 대안은 정몽준 의원이 1순위가 될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실제로 참여정부 출범이후 정 의원은 여권 핵심인사들로부터 두어 차례 총리직을 권유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지난 대선 직전에 공조가 파기되긴 했지만 정 의원이 노 대통령 당선에 일등공신이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 노 대통령 입장에서는 정 의원에게 적잖은 정치적 부채를 안고 있는 셈이다.
두 사람의 이러한 각별한 인연과 정치적 채권채무 관계가 맞물려 총리직을 제안했을 것이란 추론이다.하지만 정 의원은 그동안 여권의 제의를 고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후 사정이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지분이 담보되지 않은 총리직을 정 의원이 마땅치 않아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내치를 전담하는 책임총리를 제안할 경우 정 의원의 생각도 달라질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특히 정 의원은 대망론을 꿈꾸고 있는 만큼 책임총리는 더 없는 대권수업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구미가 당길 것으로 관측된다.코너에 몰린 노 대통령과 여권 입장에서도 정국 반전과 정치권 새판짜기 차원에서 정 의원에게 책임총리를 제안할 가능성이 높다.
2002년 대선 초심으로 돌아가 제동걸린 개혁 드라이브를 재가동하는 동시에 국민 대화합을 명분으로 자연스럽게 정계개편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여권이 난마 해결책으로 구상하고 있는 거국내각 내지는 ‘민주대연정’ 플랜을 현실화시키기 위해서도 중립적 성향인 정 의원이 책임총리로 제격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실제로 여권 핵심부 주변에서는 벌써부터 정 의원을 책임총리로 추천하라는 ‘밀명’이 나돌고 있다. 재보선 참패로 수렁에 빠진 노 대통령과 여권이 연말 개각에 맞춰 책임총리제 카드를 꺼내들지, 또 그 대상은 누가 될지 정가의 이목이 청와대를 향하고 있다.
홍성철 anderia@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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