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이번 감사보고서 유출로 남북협력기금 유용 논란이 벌어졌고 대북사업 주무 부서인 통일부와 관계가 급속도로 악화됐기 때문이다. 심지어 ‘현대그룹이 한나라당과 짜고 열린우리당의 유력한 차기 주자인 정동영 통일부 장관을 흔드는 것이 아니냐’는 밀약설까지 떠도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런 정황에 따라 정 통일부 장관의 압력설도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일부에선 북한측이 지난 20일 담화문에서 “현대 상층부가 곁에 와 붙어 기생하려는 ‘야심가’들을 버리고 옳은 길에 들어선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금강산관광의 넓은 길을 열어줄 것이다”라고 밝힌 직후 이루어진 ‘사퇴수리’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즉 현 회장이 북측과의 협상에 앞서 ‘화해를 위한 성의표시’를 한 게 아니겠느냐는 주장이다.
이런 맥락대로라면 최 사장은 현 회장측에 붙어 있는 야심가인 셈이고 현 회장은 야심가를 제거함으로써 북측의 요구에 일정부분 굴복했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현 회장이 단순히 ‘성의’를 보여주는 차원이 아니라는 주장도 나온다. ‘읍참마속’ 즉 대의를 위해 잠시 소를 접어두는 쪽에 가깝다는 것이다. 우선 최 사장이 완전히 퇴출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신빙성을 두고 있다. 최 사장은 여전히 현대엘리베이터 사장으로 남는다. 현대엘리베이터는 사실상 현대그룹의 지주회사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2인자로 남을 수 있다. 또한 현대 내부에서는 일찍부터 그룹구조본 격인 경영전략팀의 불필요성을 제기해오던 터이기도 하다. 지난 2003년과 2004년 그룹 지주회사 격인 현대엘리베이터 경영권을 둘러싸고 KCC와 경영권 분쟁을 벌였을 때 경영전략팀이 절실했지만 경영권이 안정된 상황에서 좀더 유연한 체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 것. 그래서 현 회장을 보좌하는 기능을 강화시키는 비서실 확대쪽으로 가닥이 잡힌 상태다. 비서실장은 이기승 현 경영전략팀 전무가 맡을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현 회장은 자신의 오른팔까지 자르면서 북측에서 얻으려는 것은 무엇일까. 금강산 관광의 정상화나 개성관광의 독점권 정도로 그치지 않을 것이란 게 재계의 시각이다. 현 회장은 이번에 좀 더 확실한 다짐을 받겠다는 것이다. 바로 남편인 고 정몽헌 회장때 받아뒀던 7대사업 독점권 등에 대한 보장을 현 회장이 다시 확실히 약속받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북측이 이와같은 주장을 고스란히 수용할지는 미지수다. 대북사업에 대한 국내 여론이 부정적으로 비춰지는 것을 우려하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주도권을 쉽게 넘기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여하튼 최 사장의 사퇴로 적어도 금강산 관광 정상화 협상은 급물살을 탈 전망이다. 이봉조 통일부 차관은 지난 27일 주례브리핑에서 “(북한의 만나자는 제의에) 현대측이 11월초 접촉을 갖자고 회신을 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 현대·롯데 상관없어, 돈만 준다면 어디든OK
“북한하고는 합의라는 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당 고위간부와 북한 국회 의사당에서 정식 사인을 해도 밑에서 모르겠다하면 그만이에요. 사업이 제자리를 잡혀가도 북한쪽에서 느닷없이 입국금지령을 내릴 때도 부지기수죠.”수년간 북한과 합영사업을 해온 기업인 김모씨. 김씨는 현대의 현 회장은 물론 정부에서조차도 김정일 정권의 ‘앵벌이’에 놀아나는 것 같다는 주장을 펼쳤다. 김씨에 따르면 북한이 현정은 회장을 상대로 ‘금강산관광을 중지시키겠다’, 현대에 주기로 한 개성관광 사업권을 ‘롯데관광에 넘기겠다’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말했다.
롯데관광측에 100억원의 뒷돈을 요구한 사실이 드러난 것도 마찬가지 의미다. 남북경협을 해온 사업인들은 공히 “북한 지도부는 기업을 키워서 이윤을 나눠 먹는다는 생각이 없다”며 “그 사람들은 기업을 약탈의 대상으로 생각한다”고 잘라 말했다. 이 관계자는 현대 현정은 회장이 11월에 북한당국에서 요청한 면담에 참가함으로써 중단된 관광사업이 재개될 가능성은 커졌지만 마찬가지로 김정일 위원장의 앵벌이 요구도 다시 들어줘야할 난감한 상황에 봉착한 것만은 틀림이 없다고 내다봤다. 결국 김 위원장은 국내 기업들과의 사업에서 갑의 위치를 절대로 놓치지 않을 것이며 무리한 요구도 이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bobos@ilyoseoul.co.kr 이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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