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문학 위기’ 담론에 반기 든 숭실대 박정신 교수
지난달 15일 고려대 문과대(학장 조광) 교수 117명의 ‘인문학 선언’ 이후 인문학이 사회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인문학계는 학계의 목소리를 대변할 단체까지 구성, 본격적으로 활동할 조짐이다. 이는 지금까지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 말을 아끼거나 의견을 표출하는 데 그쳤던 인문학자들이 처음으로 집단적 움직임을 보인 것이어서 상당한 파장을 예고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한 중견교수가 ‘인문학 위기’ 담론에 반기를 들어 눈길을 끌고 있다. ‘인문학의 위기는 없다’고 주장하는 숭실대 기독교학과 박정신 교수(한국근현대사 전공)가 그 주인공. 미국에서 14년간 교수생활을 해오다 지난 2000년 숭실대 교수로 임명된 그는 “나는 비강단파”라며 인문학의 본질과 가치, 그리고 위기론에 대해 소신껏 주장을 펼쳤다. 인문학의 가장 큰 덕목이 ‘인문학적 상상력과 자기성찰’이라는 그는 돈·명예·권력 등 이른바 ‘경제주의’에 빠진 일부 인문학자들을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지난달 27일 오후, 서울 동작구에 위치한 숭실대 연구실(사회봉사관)에서 그를 만났다.
“인문학자들이 인문학 위기 담론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비인문학적인 행태다.”
최근 ‘인문학 위기’ 담론을 비판하는 발언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는 박교수는 이날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 같은 말로 말문을 열었다.
박교수는 “‘인문학 선언’ 발표는 매너리즘에 빠진 교수들이 벌이는 일종의 ‘이벤트성 쇼’”라며 “이번 선언에 나선 교수들이 혹시 학진(학술진흥재단) 안팎에서 연구 프로젝트를 수주해오던 사람들은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비판했다.
학진프로젝트 수주했던 사람
박교수는 최근 교수들이 인문학 위기를 선언하고 나선 본질적인 이유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학문연구에 올인, 매진할 수 있는 사람만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자격이 있다”며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자리, 연구비, 입지 등 ‘밥그릇 챙기기’에만 바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사실, 이번에 교수들이 인문학 위기를 선언하고 나선 이유는 학생들이 학과에 지원하지 않기 때문에 불거진 문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생들은 ‘취업하기 힘들고 돈 벌기 어렵다’는 이유로 인문학을 기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방대학에서 인문학과들이 없어진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서울 및 수도권 대학 내 인문학과는 아직 ‘폐강’과는 거리가 멀다. 일각에서는 “지방의 학과들이 없어지면 곧 서울의 학과들도 없어질 것이라는 위기감, 즉 그들의 ‘자리’를 잃기 때문에 교수들이 단체로 선언문을 발표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그는 인문학 과목이 폐강되고, 연구비가 모자라며, 박사학위를 받고 자리를 잡지 못하는 연구자들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인문학이 위기에 처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인문학에 의존한 인문학자들의 ‘생계’ 문제가 인문학의 본질적 위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인문학의 위기는 이제껏 있어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있을 수 없다”며 “돈을 좇는 인문학자들의 위기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권력이 주는 돈은 ‘독약’
박교수는 인문학이라는 학문에 대해 “인문학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학문으로, 인간의 가치와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학문”이라며 “또 당장 눈앞의 성과는 내지 못하지만, 궁극적으로 모든 학문과 교육의 토대가 되는 학문”이라고 설명했다. 인문학이 흔히 학문의 ‘지하수’에 비교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그는 “지하수가 고갈되면 지상의 생명은 말라죽게 된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박교수는 또, “인문학의 가장 큰 덕목은 자기성찰인데 우리나라 인문학자들은 성찰과는 거리가 먼 ‘비인문학적 방식’으로 교수를 뽑아왔다”며 학연, 지연 등의 ‘연줄’에 기대는 한국의 고질적인 대학교수 채용 관행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다.
특히, 그는 “돈·권력과 통하는 정부라는 곳에 연구비 등 지원을 촉구, 의존하는 것은 ‘마약’에 손을 대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이는 돈에서 독립되어야 하는 인문학의 독창성을 죽이는 꼴”이라고 말했다. 정부의 연구비 지원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스스로 ‘경제주의의 노예’로 전락하는 길이며, 장기적으론 인문학의 ‘독약’이 된다는 얘기다. 그는 “권력이 주는 돈을 인문학자들이 단체로 나서 요구했다는 게 가장 큰 문제”라며 “이는 경제주의에 종속·복속되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며 성토했다.
또, 박교수는 “우리의 인문학이 잘못된 채용 관행과 불합리한 연줄, 유착관계 등을 넘어서기 위해 과연 어떤 노력을 했는가”라고 반문하며 “인문학자에게 필요한 것은 자본과 권력, 자리가 아니라 인문학적 상상력과 자기 성찰적 자세”라고 강조했다.
학생과 대중이 ‘원하는’ 교수 돼야
그렇다면 박교수는 위기에 빠진 인문학자들에게 무엇을 주문하고 있을까.
다름 아닌 ‘교수 채용 방식을 바꾸고, 그들에게 비전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대표적인 예로 “문화 콘텐츠 작품을 만든 이들이 인문학과의 교수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대중적인 인문학 저서를 만든 이들과, 인문학 저서를 많이 쓴 사람이 학위와 이력에 관계없이 인문학과의 교수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다시 말해, 학생들과 대중들이 ‘원하는’ 사람이 대학교수가 돼야 인문학도 실용학문에 근접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렇지 않고 대학 안에서 안주하며 인문학의 위기론을 말하는 이들은 기존의 자신의 틀을 유지한 채 정부의 지원에 의존하려는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박교수의 설명이다. 실제로 그는 자신과 절친한 철학과 교수가 쓴 책을 보여주며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책은 바로 이런 게 아니겠느냐”며 기자에게 건네기도 했다. 책은 어느 철학자의 업적 및 풀스토리를 담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어려운 책, 아니 고리타분한 책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이 철학교수는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정리해놓았고, 비주얼적인 요소도 고려,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도록 힘쓴 흔적이 역력했다. 박교수는 “자신의 업적 및 연구결과를 반드시 대중화해야 한다는 게 지식인의 의무는 아니지만, 대중들이 원하는 교수가 돼야 인문학자들이 위기의 벼랑 끝에 서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 ‘디오게네스 철학이론’이 곧 ‘인문학의 정신’
박 교수는 인터뷰 중, 거지철학자 디오게네스 일화를 빗대 인문학의 정신을 표현하기도했다. 박교수에 따르면,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청빈생활을 하면서 온 국민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이를 시기한 알렉산더 대왕은 디오게네스를 찾아갔다. 디오게네스는 마침 토굴 속에서 햇볕을 쬐기 위해 밖에 나와 앉아 있었다. 물론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했다. 그때 알렉산더는 “네가 원한다면 이 나라의 절반이라도 줄 것이니 뭐든지 말하라”고 했다.
그때 디오게네스는 물끄러미 알렉산더를 쳐다보다 한참 후에 손가락 하나를 들어 좌우로 젓는 시늉을 하면서 옆으로 비키라는 손짓을 했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당신이 내 앞에서 태양을 가려서 추우니 비켜 달라’고 해 콧대 높은 알렉산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는 얘기다. 이 일화는 ‘아무리 직위가 높고 돈이 많아도 마음이 부자라야 더 떳떳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무엇을 갖기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인문학의 가르침. 이제 그 고귀한 가치가 재조명돼야 할 때다. <은>
정은혜 kkeunnae@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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