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회장이 영남일보를 인수한 것은 지난 83년. 대한그룹의 가전과 통신사업을 인수해 대우전자와 대우통신으로 개명했을 때다. 당시 A일간지 편집국장 출신으로 대우전자 임원인 C씨가 김 회장에게 언론사 진출을 강력하게 권유했다. 김 회장도 평소 언론에 대한 관심이 높았기 때문에 흔쾌히 응했다. 다음은 김 전 본부장의 회고다. “당시까지만 해도 재벌그룹은 정부의 ‘밥’이었습니다. ‘까라면 까’라는 먹이사슬이 명확히 존재했습니다. 김 회장은 이런 구조에 넌더리가 났던 모양입니다. 정부의 공격을 일정 부분 방어해주는 역할로 언론사를 택했습니다. 대우그룹의 이미지를 대외에 알리고 비즈니스를 진행하기 위해서도 언론사는 필수였습니다.”즉시 신문사 인수를 위한 팀이 꾸려졌다. 마침 언론 통폐합이 실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인수대상을 선택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중앙일간지와 지방일간지 6개를 놓고 저울질하는 상황에서 김 회장은 주저 없이 영남일보를 지목했다. 김 전 본부장에 따르면 김 회장과 영남일보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 김 회장은 6·25 전쟁 발발 당시 대구에서 피난살이를 했다. 당시 나이 열네살. 전쟁의 아수라장 속에서 열네살짜리 사내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는 신문사에 근무하는 아버지의 제자를 통해 어렵게 신문팔이 일을 시작했다. 이렇게 인연을 맺은 신문이 바로 영남일보라는 것이다. 김 전 본부장은 “회장으로부터 피난 시절 네 식구의 끼니뿐 아니라 연세대 학자금까지 신문팔이로 조달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면서 “이런 인연 때문에 영남일보를 가장 먼저 선택한 것 같다”고 귀띔했다. 물론 당시만 해도 대우그룹은 신문사 출자가 불가능했다. 때문에 김 회장은 그룹 임직원 이름으로 영남일보를 인수했다. 대신 파트너를 통해 언론사에 걸맞은 구색을 맞추기로 했다. 이 파트너가 바로 대구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박창호 전 갑을그룹 회장이다. 당시 박 전 회장도 영남일보 인수를 강하게 원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50%씩 지분을 나누기로 의견을 모았다.
인수작업이 끝나자 대우전자 임원으로 있던 C씨를 포함한 직원 3~4명 정도가 영남일보로 파견됐다. 광고도 연 20억원 상당까지 집행하는 등 전폭적으로 투자를 진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 사정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노조 문제까지 겹치자 김 회장은 경영에서 손을 떼기로 결심했다. 김 전 본부장은 “당시 김 회장은 부산매일 인수도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영남일보를 넘기기로 결심하고, 박창호 전 갑을 회장과 의논해 나머지 지분 50%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경영에서 완전히 철수했다”고 설명했다. 이때가 영남일보를 인수한 지 10년 후인 93년. 영남일보의 경영권을 움켜진 박 전 회장은 영남일보 회장으로 취임한 뒤, 신사옥을 건축하는 등 대대적인 투자를 단행했다. 이렇게 쏟아 부은 돈이 연 수백억원에 달했다는 게 김 전 본부장의 귀띔이다. 그는 “외환위기 이후 갑을그룹이 부도가 난데는 섬유산업 붕괴가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영남일보에 무리한 돈을 쏟아 부으면서 체력이 급속히 약화된 것도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 회고록에서 엿본 김 회장의 신문팔이 생활
김 회장의 천성적인 비즈니스 기질은 피난시절 신문팔이 때도 엿볼 수 있었다. 당시 김 회장의 나이 열네살. 김 회장이 신문을 받아 주로 팔던 곳은 방천시장이었다. 신문을 받아들면 중간에서 한 장도 팔지 않고 방천시장으로 달려갔다. 중간에서 몇 장 파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사이 다른 사람이 앞질러서 달려가 버리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항상 맨 먼저 방천시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1등으로 도착한다 해도 시장을 독차지할 수는 없었다. 신문 한 장을 팔면 거스름돈을 주어야 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기 때문이다. 하루에 100장을 팔아야 네 식구의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던 김 회장은 효과적인 방법을 쓰기로 했다.
거스름돈을 미리 삼각형으로 접어서 주머니에 넣은 뒤, 가지고 다니는 것이었다.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신문을 다 팔수는 없었다. 3분의 2쯤 가다보면 뒤에서 다른 아이가 쫓아와서 앞서 나가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아예 신문값은 받지 않고 신문만을 던져주었다. 신문값은 나중에 그 길을 돌아오면서 느긋하게 받았다. 몇 달 동안 이런 식으로 신문을 팔자 다른 신문팔이는 그곳에 나타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물론 일부는 신문값을 떼먹기도 한다. 그러나 한 두 사람에게 신문값을 떼이더라도 신문을 다 파는 편이 훨씬 이익이었다. 이렇게 해서 김 회장은 어렵던 피난시절을 넘길 수 있었다고 한다.
이석 suk@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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