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인시대’ 양하사가 바라 본 거지왕 김춘삼
지난 11월 26일 드라마 ‘왕초’에서 차인표가 연기한 실제 주인공으로 잘 알려진 김춘삼씨가 오랜 투병생활 끝에 향년 78세로 별세했다. 전쟁 고아, 거지 등 빈민들과 함께 해온 평생의 삶이 반영하듯, 12평 전세방만 남기고 진정한 ‘왕초’로서 생을 마쳤다. 대전에서 시작한 전쟁고아 수용시설 ‘합심원’ 사업은 그를 전국적인 인물로 만들었다. 서울에서 이를 기반으로 한 때 정치권과 밀월을 하기도 했지만, 항상 본인 스스로 ‘무소유’의 철학을 지키며 살았다.
배우지 못한 ‘본인’을 원망하듯, 배움에 뜻을 두고 있는 후배들에 대해 아낌없는 지원을 해줬다. 70세의 나이에 공해추방국민운동 총재로 활동하면서 ‘시민운동가’라는 이름도 얻었다. 비록 ‘거지’였지만, 권력 실세들과 어울리면서 우리 사회의 후미진 곳을 비추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 주류의 모습이 스치면서 씁쓸함이 배어나온다.
<일요서울>은 당대에 함께 생활해온 김춘삼의 친구 ‘양하사’(양주천씨)를 통해 ‘거지 왕’의 삶을 재조명해봤다.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춘삼이는 과장된 게 많지요.”
지난 60여년 동안 한국 사회 격동기를 함께 살아온 김춘삼의 오랜 ‘친구’가 기자에게 던진 첫 마디였다. 예상 밖의 ‘일성(一聲)’이었지만, 그는 이 말을 내뱉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지난 11월 31일 서울시 강동구 둔촌동 부근에서 만난 ‘원로’ 건달 양주천씨는 고인이 된 김춘삼의 ‘삶의 궤적’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유일한 생존 인물이다. 그는 ‘야인시대’라는 드라마에서 등장한 건달 ‘양하사’의 실세 주인공이기도 하다.
“김춘삼과 나는 군대 동기”
양씨는 명동을 주름잡던 ‘신상사’(신상현)와 어깨를 나란히 했을 정도로 당대의 타고난 싸움꾼이었다. 유난히 발을 잘 사용한 깡패로 신상사와 함께 낭만파 주먹시대의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했다.
양씨는 전화 연락을 하고 찾아 온 기자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도대체 나를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요?”라는 질문부터 던졌다.
60년대부터 종로와 서대문 일대에서 건달로 살아온 양씨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어느덧 80세를 바라보는 나이도 그렇거니와 양씨는 특히 주먹세계 밖으로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양씨는 그러나 병원 구내식당으로 자리를 옮기자, “내가 하는 말은 과장된 게 없어. 그동안 살면서 쭉 지켜봐왔던 일들이니까, 알아서 새겨들으면 될 거요”라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김춘삼에 대해 “춘삼이는 무식하긴 했지만 돈에 욕심이 없는 친구였다”면서 “없이(가난) 사는 사람들한테 있어서는 ‘산타클로스’ 같은 존재였다”고 평가했다. 책과 드라마를 통해 그려진 김춘삼은 항상 거지 신분이었지만, 존경받을 만한 삶을 살아왔다고 추켜세웠다.
양씨가 처음으로 김춘삼을 만난 것은 1949년 가을이었다. 국방경비대 하사관(현 부사관)학교에서 두 사람은 한 내무반에서 생활을 했다. 당시 대전에는 제 19연대 하사관학교가 설립됐고, 두 사람은 1기로 입대를 한 것이다.
양씨는 “그 때 내가 21살인가 그랬는데, 춘삼이는 부대 전체에서 가장 인기가 좋았다”면서 60여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 과거를 회상했다. 김춘삼은 당시 접하기도 어려웠던 탭댄스, 노래, 만담에 능했다고 한다.
“춘삼이는 어디서 배웠는지 ‘탭댄스’를 기가 막히게 잘 췄다. 노래면 노래, 만담이면 만담까지 오락이라면 못하는 게 없을 정도로 재능이 많던 놈이었다”고 했다. 그 바람에 부대에선 김춘삼을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정도로 인기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양씨와 김춘삼의 내무반 생활은 6·25 전쟁 발발로 그리 오랫동안 지속되지 못했다. 김춘삼은 전방으로, 양씨는 후방으로 각각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재회한 시기는 1953년 휴전 선언이 내려진 직후였다.
대전으로 돌아온 김춘삼은 당시 충남도경찰국장 유 모씨의 도움을 받아 ‘간장 공장’을 차리고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정부의 허가를 받고 중동 지역에서 간장을 만들어 팔았던 김춘삼은 전쟁고아들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전국적으로 수 만명이 넘는 고아들은 대부분 ‘거지’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다.
양씨는 “김춘삼이 간장공장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거다”면서 “경찰국장의 도움을 받아 사업을 하는데 큰 불편이 없었다”고 말했다.
당시 유국장이 김춘삼을 도왔던 이유는 그의 아버지와의 인연 때문이다. 김춘삼의 집안은 알려진 것과 달리 유복했었다고 한다. 당시 유국장이 김춘삼의 아버지에게 큰 신세를 입어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부산서 박정희 전대통령과 첫 만남
하지만, 김춘삼은 얼마 뒤 간장 사업을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넝마쟁이’ 왕초로 거리를 누비기 시작했다. 사업을 정리한 비용을 가지고 대전 시내 하천변에 천막을 짓고 ‘합심원’을 세운 것. 거지 생활을 시작하면서도 ‘빈민’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는 기개를 보였다.
양씨는 “깡통 차고 거지생활을 하면서도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김춘삼이 ‘난놈은 난 놈이구나’ 생각하게 된 첫 번째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김춘삼은 자신을 후원해 주던 유 국장이 근무지를 옮길 때마다, 그를 따라 이동했다. 서울시경 국장으로 자리를 옮겼을 당시 염천교에도 ‘합심원’을 세웠다. 당시 이곳에서 폭력을 일삼던 거지 왕초를 제압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유국장은 부산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났고, 부산에서도 김춘삼은 거지들의 왕초로 한동안 살았다. 당시 김춘삼은 부산에서 박정희 전대통령과 ‘인연’을 맺게 된다.
도둑질을 하며 살던 넝마쟁이들을 하나 둘씩 수하로 끌어들인 김춘삼은 부산 서면에 세운 합심원 인근을 청소하는 일로 아침을 맞았다. 군수기지사령부 옆에 합심원을 세운 터라 사령부 주변 청소도 이들의 몫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박정희 소장이 거리를 지나다 이들을 불러들였다.
양씨는 “그 때 박정희 대통령이 하도 기특해서 선물을 주겠다고 했는데, 김춘삼이 순진하긴 순진했지. 아 글쎄 애들하고 같이 살려면 천막이 필요하니까 군 막사를 짓는 천막을 달라고 한 거 아니겠어”라며 미소를 지었다. 박정희 소장이 대통령이 된 뒤에는 두 사람의 관계가 단절됐다.
그 후 김춘삼은 부산에서부터 서울로 상경하면서 지방 곳곳에 넝마쟁이들을 모아 합심원을 세우게 된 것이다. 상경 후에는 현용산역 부근에 자리를 잡고 ‘왕초’ 역할을 이어갔다.
김춘삼의 결혼에 얽힌 ‘일화’도 소개했다. 양씨는 “일자무식의 춘삼이가 고등교육을 받은 아리따운 16세 연하의 부인을 만난 건, 순전히 춘삼이의 계획(?)이었다”며 또 한 차례 웃었다.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김춘삼은 부인을 통해 글을 깨우치고 세상 물정을 익혔다고 한다.
합심원 등으로 세력이 커진 김춘삼은 김두한으로 대변되는 주먹세대 1기의 후배로도 활동했다. 김두한, 시라소니, 이정재 등이 당시를 주름잡았다면, 그 이후에는 유지광, 신상사, 김춘삼 등이 있었다.
양씨는 이와 관련, “방송을 통해 알려진 건 사실이 아니다. 춘삼이도 이점에서는 솔직하지 못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일부 방송국 드라마에서 김춘삼은 김두한, 이정재 등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것으로 묘사됐지만 사실 동급 반열은 아니라는 것이다. 양씨처럼 자신의 세대에 속한다고 했다.
김춘삼의 싸움 실력에 대해 묻자, 양씨는 멋쩍은 듯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드라마 주인공이 김춘삼 역할을 잘 소화하다보니, 과장된 부분이 있었다고 했다.
양씨는 “내 자랑 같지만, 나하고는 상대가 안됐다”며 “나는 양하사로 불리긴 했지만 실제로는 상사로 제대했고 명동 신상사하고는 친구로 지냈다”고 설명했다.
양씨는 실제 명동을 주름잡던 신상사와 담판을 벌인 뒤, 우정을 나누는 사이로 발전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에 얽힌 얘기도 조금 더 털어놨다.
“나는 아직도 불만인 게, 내가 헌병으로 있으면서 분명히 상사로 전역을 했는데 계속 양하사라고 부르더라고. 그게 다 서대문에 있던 최창수 때문이야.”
판·검사로 성공한 후배 상당수
지금은 고인이 된 서대문 보스 최창수씨가 주먹계 생활을 담은 자서전을 쓰면서 자신을 ‘양하사’로 묘사했다는 것. 양씨는 “창수가 나한테 양하사로 써서 미안하다고 농담까지 했는데, 지금은 모두 다 죽고 나만 남았다”며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김춘삼은 국내에서 최초로 합동결혼식을 치른 것으로도 유명하다. 빈민으로 살아오던 사람과 종로3가에 모여 살던 여성들을 연결해 모두 120쌍이 결혼식을 올렸다. 양씨는 “춘삼이가 한 일 중에서 또 한 가지 잘 한 게 있다면 그건 합동결혼식일 것”이라고 말했다.
김춘삼은 또, 똑똑한 동생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김춘삼의 후원으로 성장한 인사들 중에는 판·검사, 변호사가 20여명에 이를 정도라고 한다. 일부는 김춘삼이 양자로 들이기도 했다.
김춘삼이 남기고 간 게 12평 전셋집이 전부이듯, 평생을 남에게만 베풀고 살아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항상 자신보다 못한 주변 사람들에게 돈을 나눠주곤 했다. 어쩌면 돈에 대한 ‘개념’이 일반인과 달랐을지도 모른다.
양씨의 기억 속에 김춘삼은 “당시 넝마쟁이는 그 숫자가 많을수록 의외로 큰돈을 만질 수 있는 일이었다. 성격이 좀 독선적이어서 그렇지, 춘삼이는 항상 동생들에게 자기 주머니를 털어 주곤 했던 사람”으로 남아 있다.
김춘삼이 베푼 빈민에 대한 사랑은 70세가 넘은 나이에도 사회운동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법보다 주먹이 앞섰던 지난 시절 거지왕 김춘삼은 정치권과의 밀월을 하기도 했다.
정치권과 밀월은 ‘잠시뿐’
그러나 그 깊이로 볼 때, ‘정치깡패’로까지 변질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폐질환을 앓고 있던 그는 환경운동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공해추방국민운동 중앙본부 총재로 활동하면서 국제거지연합회장에서 시민운동가로 변신하기도 했다.
양씨는 “춘삼이가 후원해서 크게 된 사람들이 많은데, 장례식에 가보니 몇 놈밖에 안보이더라”면서 “그래도 국립현충원에 묻힌다고 합디다. 그나마 춘삼이가 살아온 인생이 오래 기억될 수 있게 돼 다행”이라며 말문을 닫았다.
# ‘양하사’ 양주천씨는 누구인가
명동 신상사파 신상현과 담판
일명 ‘양하사’로 알려진 양주천씨는 해방 이후 주먹계에 숨은 별로 통하는 인물이다. 김두한, 이정재, 이화룡 등으로 이어지는 1세대의 뒤를 이어 ‘신상사’와 교우하며 명동과 서대문 일대를 주름잡기도 했다.
양씨는 “신상사하고 나하고 담판을 겨루고 나서 친구로 지내왔다”며 “그 때까지만 해도 칼잡이들은 없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지난달 고인이 된 김춘삼과는 60년 지기로 알려져 있다. 1949년 김춘삼과 함께 대전 19연대 하사관학교에 입대해 한 내무반에서 생활했다. 휴전 이후에도 두 사람은 연락을 하며, 줄곧 ‘동기’로서 지내왔다.
그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상사로 진급했지만, 계속해서 ‘양하사’라는 별칭으로 불리곤 했다.
헌병 생활을 했던 양씨는 아직도 전쟁의 상처를 안고 산다. 뒤통수에 박힌 총탄이 그의 인생 역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60년을 함께 한 총탄도 그의 파란만장한 삶에 별다른 지장을 주지 않았다.
특유의 발차기로 건달계에 이름을 날린 양씨, 그는 80세를 바라보는 나이지만 아직 건장함을 잃지 않고 있다.
양씨는 “요즘은 이권사업, 돈에 얽매여 조직이 움직이고 있다. 어렵고 힘들었던 시기였지만, 나는 아직도 60~70년대 함께 했던 진정한 ‘주먹’들이 그립다”고 말했다. 당시 양씨와 함께했던 대부분의 ‘주먹’들은 세상을 떠난 지 오래다.
<현>
김대현 suv15@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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