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황기현 기자]](/news/photo/201907/323459_240880_4254.png)
[일요서울 | 황기현 기자] 지난 5월 귀가하는 여성을 쫓아 집까지 침입하려 시도했던 ‘신림동 CCTV’ 사건은 전 국민에게 큰 충격을 줬다. 당시 범행을 저지른 남성은 술에 취해 귀가하던 여성을 따라 한 원룸 건물로 들어섰다. 이 과정에서 남성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았다. 여성의 집 현관문이 1초만 늦게 잠겼어도 끔찍한 추가 범행이 발생할 뻔 한 상황이었다. 지난달 28일에도 귀가하는 여성을 따라 원룸 건물 안으로 침입한 경찰이 입건되는 사건이 있었고, 11일에는 신림동 한 원룸에서 한 남성이 화장실 창문을 통해 침입해 혼자 사는 여성을 성폭행하려 한 ‘신림동 강간미수 사건’이 발생했다.
최근 여성 노린 원룸 침입 사건 잇따라
‘유명무실’한 원룸촌 공용현관 비밀번호
이처럼 최근 두 달 새 혼자 사는 여성을 노린 범죄가 잇달아 발생하며 원룸촌 자취생들이 공포에 떨고 있다. 특히 지난해 7월 기준 서울에서 1인 가구 비중이 가장 많은(53%) 관악구와 관악구에 인접한 구로구 등에서는 두려운 분위기가 더욱 커지고 있다. 지난 16일 기자가 찾은 신림동 원룸촌은 이런 분위기를 드러내듯 을씨년스러웠다. 적막한 골목에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한 원룸 공동현관에는 검은 펜으로 4자리의 숫자가 적혀 있었다. 현관 비밀번호였다. 구로동의 또 다른 건물은 오랜 기간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아 비밀번호에 해당하는 숫자가 닳아 없어진 상태였다. 아예 공동현관을 연 채로 고정해 놓은 곳도 적지 않았다. 최근 잇따라 범죄가 발생한 지역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을 정도로 아무런 대비가 돼 있지 않았다. 거주자 외의 침입을 막기 위한 용도인 공동현관은 유명무실했다.
신림동에서 혼자 거주 중인 직장인 김모(25·여)씨는 “자취를 시작한 지 반 년 정도 됐는데 아직도 무섭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며 “신림동에 유흥가가 밀집돼 있어 취한 사람도 많고, 걱정이 된다”고 토로했다. 이어 “엄마도 많이 걱정한다. 집에 갈 때는 부모님이랑 남자친구와 전화를 하면서 간다”면서 “요즘은 귀갓길에 뒤를 돌아보는 게 습관이 됐다. 앞서 가는 사람도 저 때문에 뒤를 돌아보고 아주 난리다”라고 덧붙였다. 또 다른 직장인 김모(28·여)씨 역시 불안감을 감출 수 없다. 김씨는 “평일 낮에 집에 있는데 어떤 남자가 비밀번호를 누른 적이 있다”며 “신고해도 훈방 조치되고, 보복이 두려워 그냥 소리쳐서 쫓아낸다”고 전했다. 그는 “일부러 아빠 속옷을 널어놓기도 한다”고 말하며 한숨을 쉬었다. 이 외에도 배달 음식을 문 앞에 두고 가라고 하거나 현관에 보조키를 추가로 설치하는 여성들도 있었다.
가스 배관 노출된 건물이 대다수
원룸촌 건물들은 대부분 높지 않다. 낮게는 4~5층에서 높아야 8~9층이 최대다. 여기에 가스 배관이 밖으로 노출된 구조가 대다수다. 평균적인 근력을 가진 성인 남성이라면 손쉽게 타고 올라갈 수 있다. 곳곳에 발을 받칠 만한 창틀 등도 있어 범죄에 노출될 위험이 심각한 수준이다. 더욱이 원룸 건물은 층간 간격이 낮아 주차된 차량이 있다면 2층까지는 굳이 가스 배관을 타지 않아도 들어갈 수 있다. 실제로 ‘신림동 강간미수 사건’의 피의자 역시 건물 밖에 세워진 승합차를 발판 삼아 침입한 것으로 확인됐다. 혼자 사는 여성들이 한 여름에도 창문을 열고 자지 못하는 이유다. 직장인 황모(29·여)씨는 “자취를 시작하며 일부러 높은 층을 고른 이유가 창문을 열고 싶어서였다”라며 “하지만 신림동 사건을 본 뒤에는 무조건 창문을 다 잠그고 잔다. 덥지만 불안해서 어쩔수 없다”고 한탄했다.
곳곳에 CCTV 사각지대…배달원끼리 비밀번호 공유도
최근 지어진 원룸은 대부분 출입구와 엘리베이터, 복도 등에 CCTV를 설치하고 있다. 하지만 오래된 원룸 건물에는 여전히 CCTV가 없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특히 신림동처럼 원룸 건물이 밀집해 있고, 주·정차 차량이 많은 곳에서는 자연히 사각지대가 생긴다. 신림동 인근에서 부동산을 운영하는 공인중개사 A씨는 “CCTV를 갖춘 곳은 월세가 훨씬 비싸다”라며 “원룸 건물주 입장에서는 CCTV나 무인 택배함 등도 ‘옵션’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A씨에 따르면 이러한 ‘옵션’에 따라 월세는 최대 10만 원 까지 차이가 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방에서 상경해 지낼 곳을 찾는 사회 초년생 입장에서는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금액이다.
A씨는 배달원들이 비밀번호를 공유하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는 “편의를 위해 배달원들끼리 비밀번호를 공유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면서 “하지만 출입자를 한 명 한 명 모두 검사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설명했다. 구로동에서 배달을 하는 B씨는 “워낙 건물이 많다보니 시간 절약을 위해 건물 비밀번호를 공유하는 경우가 있다”면서도 “최근에는 안 좋은 일이 생긴 것을 알아서 되도록 1층에서 호출한다. 저번에 집 앞에서 벨을 눌렀더니 ‘어떻게 들어왔느냐’며 의심 하더라”라고 설명했다.
여성 집 앞까지 따라가도 ‘주거침입죄’ 뿐
문제는 현행법상 혼자 사는 여성의 집 앞까지 쫓아가도 적용 가능한 혐의가 ‘주거침입죄’ 정도 뿐이라는 점이다. 경찰에 체포되더라도 ‘범행 의사가 없었다’라고 주장하면 이를 입증할 방법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피의자가 집 안까지 따라 들어왔다는 명백한 증거가 없을 경우에는 경범죄처벌법이 적용된다. 이때 피의자에게는 ‘불안감 조성’ 혹은 ‘지속적 괴롭힘’ 등의 혐의로 벌금 몇 만원 가량이 부과된다. 경찰 측은 피의자가 피해자를 따라가더라도 성폭행 등 범죄가 벌어지기 전까지는 강한 처벌이 불가능하다고 토로했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 2013년부터 2017년까지 5년간 주거 침입 성범죄는 해마다 300건 이상 발생한 것으로 확인됐다. 여성가족부에서 제공하는 성범죄자 알림e에 따르면 성범죄자가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곳은 서울시 관악구(40명)다. 신림동 원룸촌이 관악구에 포함돼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혼자 사는 여성들이 무방비로 위험에 노출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일각에서는 정부나 지자체 차원에서 원룸 밀집 지역에 대한 대비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서울지방경찰청 역시 최근 여성안전종합치안대책 추진 태스크 포스를 확대 개편하는 등 대응책 마련에 나섰지만 방범창 설치나 야간 순찰 등 좀 더 실효성 있는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황기현 기자 kihyun@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