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 당선 일등공신, ‘성공한 대통령 만들기’ 본격시동

‘왕의 그림자, 포항 4인방(이상득, 최시중, 박창달, 이춘식), 마당발, 킹메이커, 조직 전문가, 선거의 달인, TK(대구경북)의 풍운아 등등’
8·15 광복절 특사로 복권된 박창달 전 의원에겐 유독 수식어가 많다. 1975년 집권 공화당의 ‘젊은 피 수혈 정책’에 의해 29살의 나이에 목요상, 이정무 전 의원 등과 함께 정치권에 입문한 이래 민정당과 민자당, 신한국당, 한나라당에서 33년 동안 각종 선거를 치루면서 붙은 이력이다. 두 차례 비례대표 국회의원(15·16대)과 한 차례 지역구 당선(17대 대구 동을)으로 3선의 관록도 붙었지만 선거법 위반혐의로 2005년 9월 의원직과 당원자격을 잃었다. 이후 3년간 야인생활을 하다가 광복절 특사로 당원자격과 국회의원 피선거권을 회복했다.
안국포럼 초기 멤버로 활약하다가 MB조직의 외연확대를 위해 2006년 9월 포럼 ‘한국의 힘(국민성공실천연합의 전신)’이란 외곽조직을 결성해 경선 승리에 결정적 공을 세웠다. 이명박 대통령후보 특보단장에 이어 대선 때는 유세총괄 부단장으로 MB의 경호를 책임지면서 ‘왕의 그림자’란 별칭도 얻었다.
향후 그의 행보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MB의 포항중 4년 후배로 경선과 대선, 그리고 촛불시위를 거치면서 MB의 각별한 신임을 받고 있는데다 친박, 친이, 여야 할 것 없이 폭넓은 정치인맥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MB의 애창곡 ‘사랑이여(유심초)’와 ‘머나먼 고향’을 즐겨 부르는 ‘왕의 그림자, TK의 풍운아’ 박창달 전 의원을 청와대 부근에서 심층 인터뷰했다.
-광복절 특사로 당원 자격과 국회의원 피선거권을 회복한 심정은.
▶이제 제대로 MB(이명박 대통령)를 위해 일할 수 있게 돼서 무엇보다 기쁘다. 노무현 정권이 나를 죽이기 위한 전형적인 공작정치, 표적 기획수사였지만 내가 만든 멍에라 생각하고 지난 3년간 인내하며 오로지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에 매달렸다.
-아직도 2005년 의원직 상실이 음모였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 한건의 고소고발 없이 검·경이 기획·표적수사를 한 것이다. 당초 지역민에게 선심관광과 향응을 제공한 혐의로 묶어 넣으려다 무혐의가 나오자, 지역구 사무실 직원 3명의 11개월 치 월급 4290만원을 금품제공으로 몰아 결국 사전선거운동 혐의로 의원직을 강탈했다. 열린우리당에서 조차 “너무 심했다”는 여론이 조성되면서 나에 대한 국회체포동의안이 부결된 사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열린우리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했던 17대 국회에서 박창달 전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은 찬성 121표, 반대 156표로 부결됐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지난 3년간의 야인 생활은 서민의 아픔을 이해하고 ‘제2의 박창달’로 거듭나는 계기가 됐다.
-야인생활이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이 됐다는 의미는.
▶1975년 공화당의 ‘젊은 피 수혈’ 정책으로 목요상 의원 등과 함께 청년협의회 간사로 정치권에 입문한 이래 당직자로서 국회의원으로서 정치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다. 그런데 3년간 당적 없이 외곽조직을 이끌다보니 서민들의 아픔을 이해하게 됐다. 3선의 국회의원도 이렇게 당하는데, 힘없는 서민들은 얼마나 당하겠는가? 정말 힘없고 어려운 서민을 위한 정치를 해야겠다는 소명의식을 가졌다. 그간 경험을 바탕으로 서민들을 위한 프로젝트를 구상중이다.
-이 프로젝트가 박 전 의원이 이끌고 있는 국실련(국민성공실천연합)과 관련이 있는가.
▶나중에 보면 알 것이다. 국실련은 당초 지난 대선과정에서 선진국민연대와 함께 MB 사조직의 양대 축을 형성했던 포럼 ‘한국의 힘(2006년 9월 공식출범, 회원수 30만명)’이 전신이다. MB 당선 후 MB를 성공한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한국의 힘’을 ‘국실련’으로 탈바꿈시켰다. 촛불시위에서 나타났듯 MB는 임기 내내 좌경, 급진세력과 대결을 벌일 운명이다. 이 세력에 맞불을 놓기 위해서 국실련과 같은 보호막이 필요하다. 국실련은 선진국민연대와 달리 물밑에서 조용하게 움직일 것이다.
-그러나 국실련은 이미 7·3전대 당대표 경선에 개입하지 않았는가.
▶개입으로 보면 곤란하다. 당내 갈등 봉합을 위해 화합형 대표가 필요하다는 회원들의 간절한 바람에 따라 박희태 대표를 지원한 것뿐이다. 그건 이재오 전 의원이 2006년 당 대표 경선에 출마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때는 MB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강재섭 전 대표보다 이 전 의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한국의 힘’은 경선에 개입했다는 의미인가.
▶당연하다. ‘한국의 힘’은 경선을 위해 만든 조직이었다. 당시 MB가 여론조사에서는 앞섰지만 당내 지지도에서 크게 뒤졌기 때문에 선거인단 확보가 관건이었다. 포항중 후배인 이춘식과 정두언 의원, 그리고 박영준 전 비서관 등과 초창기 안국포럼 활동을 하다가 여의도 대하빌딩에 별도 조직을 꾸린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의 힘’은 시군구, 읍면동까지 조직을 갖추고 전략적으로 움직였다.
먼저, 비당원 회원을 입당시킨 후 이들에게 당비를 내도록 했다. 당비를 내는 책임당원이 돼야만 선거인단이 될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의 힘’은 수만명의 경선 선거인단을 확보했고, 이것이 경선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나는 이미 노태우 전 대통령이 3김과 격돌했던 1987년 대선 때 정당차원으로는 최초로 전국 대학생 조직을 만들어 대학가의 좌경화 흐름을 바꾼 적이 있었다.
경북도당 사무처장 시절엔 차세대 여성위원회도 최초로 조직했다.
-이 때문에 흔히 박 전 의원을 ‘조직의 달인, 조직 전문가’로 부르는데.
▶오랜 동안 당의 청년 조직을 맡다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민정당 창당과정에서 경북지역 실무 조직을 총괄했고, 이후 신한국당, 한나라당으로 이어지면서 10여년 간 대구시당과 경북도당 사무처장을 맡았다.
당의 공식 조직 외에 내가 직접 만든 외곽조직도 20여개 가량 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맥이 전국적으로 포진됐고, ‘선거에서 이기려면 박창달을 잡아라’는 소문이 났다. 노무현 정권의 집중견제를 받은 것도 이 때문으로 MB에게서 박창달을 떼어 놓으려는 음모였다.
-MB의 포항중 4년 후배로 MB로부터 깊은 신뢰를 받고 있는데.
▶MB에게 능력을 인정받은 것은 이상득 의원의 역할이 컸다. 90년대 초.중반 경북도당 사무처장을 지낼 때 도당위원장이던 이상득 의원의 절대적 신임을 받으면서 MB와도 깊은 관계를 가지게 됐다. 동향 선배인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은 한국갤럽에 계실 때 정세를 논의하면서 큰 그림을 그리게 됐다.
-포항 4인방 가운데 이상득 의원과 최시중 방통위원장을 평가한다면.
▶이 의원은 친화력이 뛰어나고 인내심이 강하다. 특히 어려울 때 일을 해결하는 능력은 탁월하다. 지금은 오직 동생을 성공한 대통령으로 만드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반면 최 선배는 과묵하고 경청하는 스타일이다. 굉장히 합리적인 성격이라 MB의 절대적 신임을 얻고 있다. 때문에 내가 말하기 곤란한 부분은 최 선배를 통해 MB에게 전달한다.
-언제부터 MB가 대통령이 된다고 확신했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제정책이 실패하면서 국민들 관심이 ‘경제 살리기’로 쏠릴 때 MB의 강한 추진력과 리더십을 이 시대가 원한다는 확신을 가졌다.
-현재 국민들은 MB의 경제 정책을 우려하고 있는데.
▶대통령은 경제 분야에 자신감이 있다. 문제는 국민의 기대가 너무 크고 빠른 성과를 기대한다는 점이다. 국내외 환경악화와 좌파 정권 10년의 뿌리가 깊긴 하지만, 국민이 참고 도와주면 MB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실세들 간 갈등이 MB정권의 어려움을 가중시켰다는 지적도 있는데.
▶후보 경선과 인수위, 장관 인선과 총선 공천 등을 거치며 갈등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이제 당내에서 ‘친박이다’ ‘친이재오다’ 이런 것들이 다 없어져야 한다. 박근혜 전 대표가 잘해야 한다.
-박근혜 전 대표가 잘해야 한다는 의미는.
▶친박계의 수장이란 이미지는 본인과 당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지역은 아직도 경선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식으로 후유증이 오래간다면 앞으로 한나라당은 절대 경선을 할 수 없다. MB는 더 이상 박 전 대표의 라이벌이 아니다. MB를 도왔던 당원과 지지 세력을 아울러야한다. 그래야 훗날 큰일을 할 수 있다.
-이재오 전 의원이 다시 정권의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는가.
▶정치적 부담이 있다. 이 전 의원의 본바탕과 국민이 생각하는 이미지가 너무 판이한 것이 문제이다. 정권을 만든 일등공신이지만 이러한 이미지를 탈피하지 못하는 한 당분간 정치의 중심에 서기는 어려울 것이다.
-촛불시위 때 MB와 자주 독대한 것으로 아는데 주로 무슨 이야기를 하나.
▶MB의 부름이 있으면 달려가는 게 사실이지만 독대한 내용을 애기할 수는 없다. 나에게 앞으로 어떤 역할이 주어질지 모르겠지만 MB를 만나면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시중의 얘기를 가감 없이 전달할 생각이다.
-고향, 학교 후배 입장에서 MB의 성격을 표현한다면.
▶MB는 보기와 달리 굉장히 소탈하고 격의가 없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의 심정을 잘 읽는 편이다. 주위에서 말이 많다는 악담을 하는데 이것은 어떤 사안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 들어가는 성격 탓이다. MB 앞에서는 희미하게 알면 안 된다. 명확해야 한다. 어릴 때는 예의바르고 부끄러움이 많은 편이었지만 의협심이 강해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다. MB가 애창곡(유심초의 ‘사랑이여’)을 부를 때 이런 성격이 잘 드러난다.
-정치인으로서 가장 하고 싶은 일은.
▶정치 대선배로서 깨끗한 후배들이 성장하도록 돕고 싶다. 33년 정치역정을 돌아보니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던 것 같다. 정치판엔 의외로 사기꾼도 많다. 능력 있고 참신한 후배들이 상처받지 않고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정확하게 가이드 하겠다.
#박창달 전 의원 프로필
▶1946년 3월 17일 포항 출생
▶포항중, 대구 계성고, 한국외국어대학 졸업
▶1975년 공화당 청년협의회 간사로 정치 입문
▶1980년 민정당 창당 실무위원
▶신한국당, 한나라당 대구.경북도지부 사무처장
▶한나라당 대구 중구지구당 위원장
▶한나라당 교육위원회 위원장
▶한나라당 청년위원장
▶제15, 16, 17대 한나라당 국회의원
▶한·캄보디아 의원 친선협회장
▶제17대 대통령선거 이명박 후보 특보단장
▶제17대 대통령 취임준비위원회 상임 자문위원
오경섭 기자 kbswave@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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