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년간 정·부통령제로의 개헌을 고수해온 김 전 대표와 잠재적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손 지사를 향한 박 대표의 포용의 제스처가 심상치 않다는 것. 이른 바 ‘박근혜-손학규-김덕룡’으로 이어지는 차기 대권 프로젝트의 서막이라는 얘기다. 박 대표와 손 지사의 전략적 연대설은 이미 지난 7월부터 제기돼 왔다. 박 대표는 반박세력이 혁신안을 내세워 퇴진을 요구하는 가운데 손 지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경제문제 및 수도권 현안에 대한 공동 대응책을 마련한다는 이들의 주장과는 달리, 막후에서 혁신안 통과를 지원하고 있는 이 시장의 추격을 막기 위한 사전 포석이라는 게 한나라당 관계자들의 대체적인 시각이었다.
‘유신공주’ 약발 3개월
당시 한나라당 한 관계자는 “지방선거 손익계산서를 염두에 두고 혁신안과 관련해 공동대응에 합의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전했다. 혁신안은 이 시장 등 한나라당밖 잠룡들에게 유리한 방안이다. 혁신안이 원안대로 추진될 경우 당내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는 박 대표는 적잖은 정치적 타격을 입게 된다. 물론 가장 큰 수혜자는 대국민 지지도는 물론 당내 세력을 확보하고 있는 이 시장일 가능성이 크다. 최근들어 ‘박근혜-손학규’ 연대론이 급부상하고 있는 이유는 이 시장의 예상치 못한 선전 때문으로 보인다. 지방선거 공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시기까지 임기가 보장된 박 대표측에선 혁신안 수용을 거부하며 7월 전당대회 개최를 역설하고 있으나, 시간만 끌며 ‘박근혜 대세론’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인지에 반신반의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이 시장은 최근 차기 대통령 후보감 선호도 조사에서 박 대표를 제치는 등 ‘박근혜 대세론’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그의 선전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게 여론조사 분석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당시 여론조사를 진행했던 한 관계자는 “박 대표의 압도적인 지지는 선거를 전후해 두드러진다. 지난해 17대 총선과 4·30 재·보궐선거 이후 3개월 동안 한나라당내 차기 주자로서 부동의 1위를 고수했다”고 전했다. 다시 말해 ‘유신 공주’ 이미지가 누그러들 무렵이면 결국 당내 차기 주자를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밀려난다는 얘기다. 지난 해에 이어 올해 여론조사 추이를 분석해봤을 때 7월의 결과는 예측 가능했다는 것. 게다가 청계천 등 서울시장으로서 추진한 각종 사업의 결과물이 쏟아지는 오는 10월은 이 시장 지지율 상승의 시발점이 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중·장기적 전략 모색
이처럼 박 대표에 이어 이 시장으로 이어지던 한나라당 차기 주자들의 지지도 순위가 어느 순간 변경된 이후 한나라당 내부에선 개헌과 관련 ‘박근혜-손학규’ 연대론이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지방선거 공천권 지분 보장을 담보로 한 혁신안 공동대응 연대에 이어 향후 당권 및 대권과의 경쟁에서 협력을 이끌어내는 중·장기적인 전략을 모색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박 대표와 손 지사간 장기 플랜의 연결고리는 ‘개헌론’이다. 이는 박 대표와 손 지사간 가교 역할을 하고 있는 핵심 인사의 정치 이력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손학규 부통령’ 그림의 배후엔 손 지사와 함께 민주계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10여년간 정·부통령제 개헌을 주장해온 김 전 대표가 있다는 게 한나라당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김 전 대표는 지난 연말 4대 법안 처리 과정에서 박 대표와의 불협화음을 냈다. 또 행정도시법 합의와 관련 ‘빅딜설’을 제기하며 전재희 의원이 단식농성을 벌인 것을 계기로 지난 3월 원내대표직에서 물러나는 수모를 겪었음에도 박 대표가 주재하는 회의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최근의 행보가 심상치 않다는 것이다.
김 전 대표가 당내 일에 목소리를 내고 있는 이유는 박 대표의 대권 행보와 무관치 않다는 해석이다. 김 전 대표는 노 대통령의 대연정론과 관련, “국정혼란과 경제 실정을 호도하려는 실패한 전략”이라며 “연정과 관련해 어떤 협력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한나라당 관계자들은 올해 초 원내대표로서 그가 교섭단체 대표 연설을 통해 정치권에선 처음으로 개헌 논의 필요성을 제기했던 인사라는 데 주목하고 있다. 당시 그는 “전국 단위 선거가 없는 금년이 정치개혁의 적기다. 당리당략을 떠나 개헌 연구를 진척시키자”고 말했다. 이와 관련, 한나라당은 지난 7월 박 대표의 취임 1주년 기자간담회에서 청와대발 ‘연정론’은 대통령제에서는 있을 수 없다며 ‘정·부통령제를 기초로 한 4년 중임제’에 무게를 실었다. 이 역시 김 전 대표의 등장과 무관치 않다는 해석이다. 특히 김 전 대표가 원내대표 사퇴 후 김원기 국회의장 등을 비롯한 여권 중진의원들과 만나며 개헌에 관해 의견 교환을 해왔다는 게 뒤늦게 알려지면서 그의 ‘역할론’은 설득력을 더해가고 있다.
10년간 정·부통령제 주장
한나라당 대권 프로젝트의 청사진을 5선의 김 전 대표가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의 연정 발언과 김 전 대표의 개헌은 맥을 같이 하고 있다는 게 한나라당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물론 ‘박근혜 대통령-손학규 부통령’ 차기 정권 시나리오의 또 다른 주연이라 할 수 있는 손 지사는 연정구성은 물론, 내각제 및 정·부통령제 개헌에 대해 모두 반대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시장의 추격이 격렬히 진행되고 있는 시점, 박 대표와의 잦은 접촉에 대한 해명에 있어선 여전히 원론적인 수준의 대응 논리만을 구사하고 있을 뿐이다. 정기국회 시작과 동시에 반박세력의 박 대표 견제가 본격화하는 9월에도 손 지사가 일관된 입장을 표명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 노무현의 연정론 진의 “유인태도 모르다니…”
노무현 대통령과 유인태 열린우리당 의원이 서울 인근의 한 골프장에서 최근 정국흐름과 관련해 언성을 높이면서 격론을 벌인 사실이 알려져 화제가 된 바 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당시 유 의원이 지인들과 라운딩을 했는데 비슷한 시간 노 대통령이 인근에서 라운딩을 마치고 클럽하우스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를 알고 유 의원이 노 대통령이 있는 방으로 인사를 갔다. 유 의원은 “연정론 제안은 당과 상의를 좀 하고 하시지 그러셨냐”고 말했다. 이에 노 대통령은 당청 핵심인사들이 참석하는 12인 모임에서 비공개로 연정론을 처음 언급했다가 당쪽 인사에 의해 누설, 논란이 됐다는 것을 지적했다. 이어 노 대통령은 “당에서 보안을 지키지 못했다”고 언성을 높였다는 것. 사건의 발단은 ‘연정론’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의 주인공이 유 의원으로 드러나면서 정가에는 미묘한 기류가 감돌고 있다. 이른바 ‘연정론’ 파장이 요동을 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연정론은 노 대통령이 처음 제기한 이후 한동안 주목을 받다가 김이 빠지는 듯했다. 그후 안기부 도청파일 사건이 터지면서 연정론은 정치 핫이슈에서 뒷전으로 밀려났다.그러나 이번 사건으로 연정론 불씨를 살려내고자 하는 노 대통령의 복심이 무엇인지가 선명하게 드러나자 여당 의원들은 연정론에 대한 ‘MH의 복심’을 읽기에 바쁘다. 실제로 지근거리에서 노 대통령을 보좌한 참모 출신 의원들부터 시작해 정치적 동거동락을 한 중진의원들이 노 대통령의 진의와 관련된 부연 설명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정가의 대체적인 분석은 노 대통령의 진짜 뜻은 강력한 ‘연정 추진’에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쪽으로 기우는 듯하다. 대통령이 당과 상의하지 않고 ‘편지’ 형식을 빌려 대연정 구상을 전달한 부분도 그런 해석의 근거.
참여정부 전반기 청와대에서 노 대통령을 보좌한 모 의원은 기자에게 “당과 상의하지 않은 상황에서 누가 제대로 된 해석을 할 수 있겠느냐”며 묘한 뉘앙스를 풍겼다. 사실 노 대통령의 연정발언 이후 여권 내부에서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유인태 의원은 대통령의 진심을 알 것”이라는 분위기였다. 참여정부 초대 정무수석을 역임했으며 노 대통령과 오랫동안 정치 철학을 공유해온 인사로서 유 의원만은 대통령의 진의를 알고 있을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그렇지만 그동안 유 의원은 이와 관련된 개인견해를 언론은 물론 동료 여권 의원들에게도 밝힌 적이 없었다. 연정과 관련한 기자들의 질문을 받으면 여당 의원들은 유 의원을 거론하곤 했다. 그러나 이번 골프장 격론의 주인공이 유 의원으로 드러나면서, 여당 의원들조차 혼란에 빠졌다. 마지막으로 기대했던 ‘노무현 코드의 해설자’인 유 의원마저 노 대통령 진의를 몰랐다면 그야말로 노무현 복심은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이금미 nicky@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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