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한국에는 크롱카이트 같은 방송인이 없는가
왜 한국에는 크롱카이트 같은 방송인이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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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08-04 12:17
  • 승인 2009.08.04 12:17
  • 호수 797
  • 11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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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전설적인 방송 언론인 월터 크롱카이트 씨가 7월17일 치매 합병증으로 92세로 타계했다. 그는 1962년부터 1981년까지 무려 29년간이나 “CBS 저녁 뉴스 (The CBS Evening News)”의 앵커맨(진행자)으로 미국 방송 사상 전무후무한 업적을 남겼다. 요즘 조작과 왜곡으로 불신받고 있는 한국 방송 언론의 추한 몰골들을 접하면서 왜 한국에는 크롱카이트 같이 신뢰받는 방송 언론인이 없는지 아쉬움이 치민다.

크롱카이트의 빛나는 공적은 명석한 분석이나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시사평론에 있지 않다. 그의 위대함은 방송 뉴스 앵커로서 어느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이며 중립적인 뉴스 전달에 있다. 절대 개인적인 감정을 쏟아내거나 주관적인 평가를 덧붙이지 않았다.

크롱카이트는 필자가 미국서 1960년대 중반 공부하고 있었을 때 CBS 앵커였고 나는 당연히 6년동안 그의 저녁 뉴스 고정 시청자였다. 그는 서양인으로선 둥근편의 얼굴로 자연스럽게 빗어넘긴 은발에 이웃집 아저씨 같이 편안하고도 소탈한 모습이었다. 그의 말은 우아했고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카랑카랑하며 또렷했다.

그는 ‘미국에서 가장 신뢰받는 사람’으로 꼽혔다. 그는 최초로 TV 뉴스 앵커의 역할이란 객관적이고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직업윤리를 정립하였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그의 별세에 즈음해 “크롱카이트는 앵커가 평가받는 기준을 설정하였다.”며 “미국은 우상(Icon)을 잃었다.”고 애도했다.

크롱카이트는 1916년 미주리 주의 치과의사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텍사스 대학을 중퇴하고 캔사스 시티의 한 방송국 라디오 아나운서로 첫 발을 내디뎠다. 그후 그는 여러 언론사를 거쳐 2차세계대전중 미국의 UP 통신 종군기자로 활약하였다. 그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B-17을 타고 취재하였으며 독일 폭격 비행에도 가담하였다. 그는 대전후 최초로 모스크바에 UP 통신 지국을 개설하였다.

그는 방송에서 은퇴한 뒤에는 신문에 칼럼니스트로 기여하였다. 그는 2004년 88세로 ‘킹 피쳐스 신디케이트’에 마지막 보낸 칼럼에서 신문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는 “TV는 사람의 모습이나 행동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특성이 있는 반면, 신문은 후세대가 읽고 연구할 수 있는 기록을 제공한다.”고 하였다. 그는 “신문은 폭넓고 깊이 있는 기사를 제공할 수 있어 역사의 보호자가 될 수 있다.”며 신문의 심층 취재를 높이 샀다. 오바마 대통령의 말대로 크롱카이트는 ‘앵커가 평가받는 기준을 설정’하였다. 그가 세워놓은 기준에 따라 미국 방송 언론인들은 개인적인 감정이나 집단이기주의에 매몰되지 않고 냉정하게 뉴스를 제작해 전달한다.

크롱카이트의 중립적인 뉴스 전달 기준은 특히 한국 방송들의 앵커, 기자, PD 들이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우리나라 방송의 뉴스 앵커는 자사 노조에 휘둘려 편파와 왜곡으로 치닫기도 한다. 어떤 여성 앵커는 감정섞인 말투로 시청자들을 역겹게 한다. PD나 기자들은 미국 쇠고기 광우병을 왜곡해 공포심을 자아냈는가 하면, 폭력시위때 경찰의 시위자 구타 화면만 집중적으로 보여주고 폭력 시위자들의 경찰 폭행은 감추었다. 한국적 TV 저널리즘의 고질적 후진성을 드러낸 치부이고 방송언론의 수치가 아닐 수 없다. 한국 방송언론은 크롱카이트의 중립성을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 필자의 귓전에는 40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크롱카이트의 기품있고 맑디맑던 목소리가 울린다. 우리 방송에서도 크롱카이트 처럼 신뢰할 수 있는 저녁 뉴스를 하루빨리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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