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신민당 대통령후보가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수십만에 이르는 청중을 모아놓고 민주화의 사자후를 내뿜을 때 박정희 대통령의 간담이 서늘했을 것이다. 이때 그 이듬해 감행한 10월 유신을 결심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일본에서 유신쿠데타 소식을 접한 김대중 전 대통령 후보는 귀국을 포기하고 일본 망명을 택했다. 그편이 신상 안전을 지킬 수 있는 길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 후 해외언론 등을 통한 반정부 선전에 열을 올린 것은 물론이고 조직적인 투쟁대열을 갖춘 것이 사실이다. 이는 후일 전두환 정권탈취극의 빌미가 돼서 군사재판에 끌려 나가 종국에는 대법원의 사형확정 판결이 내렸지만 미국의 입김으로 ‘전두환 대통령 각하’의 자비를 구하는 탄원서를 쓰고 비밀리에 여명의 김포공항을 벗어나 미국으로의 망명생활을 한 계기가 됐다.
일본 반정부 활동 중에는 중앙정보부의 공작에 의해 배로 납치돼 현해탄을 건너오면서 수장 당할 뻔 했던 절체절명의 위기가 있었다. 대형트럭과의 빗길 추돌사고에 대해서는 당시 트럭 운전자가 사고에 대해 사주 받은 사실을 적극 부인할 뿐 아니라 오늘까지 자신이 그런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고 하는 정황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두 사람 당사자와 하늘만이 알 일이다. 어쨌건 우리는 ‘김대중’ 그가 겪은 민주화 대장정을 부인할 수 없는 사리가 분명하다.
그러나 그가 보상받아 누린 영화는 그 몇 백배로 대단할 수 있는 것이다. 국회의원 다섯 번에 평민당, 새천년국민회의 총재를 역임한데다 표 나게 번 돈 없이 대저택을 마련하고 제15대 대통령을 지냈다. 엄청나다는 비자금 문제 등 재산 축적문제는 최근에 이르기까지 국민적 논란거리가 돼있다. ‘햇볕정책’으로 이름 만든 북한 퍼주기 끝에 따낸 노벨 평화상에 대한 논란도 끊일 줄 모른다.
9주년 된 6.15 남북 공동선언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거금 5억 달러를 진상하고 평양 방문을 이룬 소산으로 평가된다. 돈 송금을 맡았던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 이 때문에 감옥을 가야했다. 이런 현실적 문제들이 ‘햇볕정책’에 대한 평가를 어둡게 하는 요소일 것이다. 역사적인 평가는 후세 몫이다. 그런걸 가지고 현 정부 하는 일이 구미에 안 맞는다고 90이 다된 고령의 몸을 직접 선두에 세워 현 정권을 ‘독재정권’으로 몰아세우는 처신이 놀랍기만 할 따름이다.
그의 변화무쌍한 말 바꾸기와 화려한 연설 솜씨가 국민을 현란케 한 역사가 어언 40년이다. 그동안 DJ의 선동정치에 힘입어 고속 성장한 정치인이 부지기수이고, 그 때문에 정치생명을 박살 당하거나 위협받은 정치인들 또한 수없이 많다. 더욱이 국민을 이런 식으로 갈라놓은 그의 분열정치는 심한 ‘남남(南南) 갈등’을 유발시켜 놓았다.
국가적 지도자가 모든 직을 떠나고 국가 원로로 대접받기 위해서는 원로다운 신중한 처신을 해야 한다. 선동정치는 그의 지난 40년 정치역사로 만판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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