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유교주의의 팽창된 가치였다. 인간세상을 이루는 근원이 효(孝)에서 비롯된다는 믿음에 이 민족은 한마디 토를 달지 않았다. 효가 반드시 충(忠)을 만들기 때문에 ‘충효’ 숭상이 도덕주의의 근본임은 말할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충’과 ‘효’를 모르면 짐승세계나 다를 바 없다는 논리로 살아온 민족이다.
그러나 이런 나라 분위기에서도 ‘충효’의 이치에 대해 생각하고 주장하는 바가 서로 차이날 수 있었다. 이 민족의 진취성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즉 퇴계 선생은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에 이미 효도해야 할 이치가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율곡 선생은 “아이가 태어나 부모의 보살핌을 받다보면 효도해야 한다는 이치를 깨닫게 된다”는 주장을 폈다.
‘삼강오륜’이 인륜적 천하지대본을 이룬 시절에 이 같은 율곡선생의 ‘효도론’은 상당히 진보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식이 부모로부터 정성어린 보살핌을 받다보면 자연스럽게 효도하는 마음이 생긴다는 율곡 이론은 확실한 효과로 나타났다. 효자 가문에 대를 이은 효자가 났고, 충신가문에 대 이은 충신이 난 것이 그 집안 산교육의 결과일 것이다.
부모의 잘못된 처사를 원망하고 욕스러워 하면서 자란 자식이 훗날 그 부모와 빼닮았다는 소리를 듣는 수가 많다. 욕하면서 배운다는 말이 이래서 나온 것이다. 나라에 충성하는 논리도 전혀 다르지 않다. 퇴계선생 주장대로 하면 아이가 태어나면서 그 즉시 나라에 충성해야 할 이치가 발생되는 것이다. 이 또한 율곡선생 같으면 사람이 국가의 보살핌을 받는 가운데 나라에 충성하고 애국하는 이치를 깨닫는다고 했을 만하다.
지금 세상이 각박해졌다고 한탄하는 소리가 높지만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달라진 건 아니다. 다만 옛날의 무조건적 충효사상이 쇠퇴된 것뿐일 것이다. 가족끼리 사랑하고 ‘효’를 실천하고 있는 가정에서 패륜적 사건이 일어났다는 소리는 들어 본적 없다. 나라 일도 같은 이치다. 위정자들이 오직 국민의 안위만을 걱정하며 국민을 편 가르지 않고 국가 발전을 위해 노심초사 하는데 나라에 충성 안할 사람이 없다.
애국은 충성심의 발로 인 것이다. 국회의사당에서 조폭집단의 영역 싸움을 방불케 하는 무도한 폭력사태가 다반사로 일어나는 나라가 우리 말고 또 있을까? 정권만 바뀌면 어김없이 지난 정권의 실세들이 비리혐의로 줄줄이 묶여가는 나라가 우리 말고 또 있을까? 정권만 바뀌면 공기업 임원 자리를 놓고 잔치 떡 나누 듯 선거공신들 논공행상하는 나라가 우리 말고 또 있을까?
이런 나라모습에 질리지 않고 등을 보이지 않을 국민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이 땅의 충효사상이 무너지면 나라의 근간을 잃게 되는 결과가 될 것이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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