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이 삭제한 김 추기경의 반공자유 수호의지
언론이 삭제한 김 추기경의 반공자유 수호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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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02-24 09:54
  • 승인 2009.02.24 09:54
  • 호수 774
  • 11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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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이 2월16일 87세로 선종하였다. 김 추기경의 빈소를 참배하는 조문 행렬은 2km에 달하였고 하루 14만명에 이르렀다. 추위속에 5시간을 기다린 사람도 있다.

서울 명동성당 주변이 김 추기경 추모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데는 까닭이 있다. 그가 47세의 젊은 나이로 추기경에 서임되었고 그후 40년동안 종교인으로서 남 보다 우뚝서서 격동의 시대에 진정한 목자로 살아온데 있다.

그는 한국 현대사의 정신적 지주 였다.

김 추기경은 산업화, 독재화, 민주화, 좌익화로 이어지는 격변의 한 가운데 있었다. 그는 파란만장한 시기에 인간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용기있는 행동과 쓴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방송과 신문들이 김 추기경의 실천적 행동과 쓴 말의 주요 부분을 삭제했다는데 아쉬움을 금할 수 없었다. 언론매체들은 김 추기경의 소외된 계층에 대한 따뜻한 사랑,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쓴 소리, 민주화 운동에 대한 헌신적 지원, 등만을 소개하는 것으로 그쳤다. 광주 5.18땐 사상자에 대한 큰 걱정과 1000만원 수표가 담긴 편지를 보내왔다는 스토리도 부각시켰다.

하지만 김 추기경의 인간 존엄성을 위한 올곧은 소리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반미친북 좌익 정권에 대해 날선 경고와 고언(苦言)을 서슴지 않았다는데서 그렇다.

김 추기경은 노무현 정부가 친북반미로 계속 돌자 2003년 8월27일 불안감을 토로하였다. 그는 노 정권에 대한 “기대가 자꾸 무너진다.”며 “아직도 불안한 것이 사실이다.”고 밝혔다.

김 추기경의 친북좌익에 대한 우려 표명은 계속되었다. 그는 다음해 1월29일 친북좌익 정책으로 “우리나라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걱정이 된다.”고 하였다. 그는 이어 “요즘 감정적 반미가 많아졌는데, 반미친북으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경고하였다.

그밖에도 김 추기경은 2004년 봄 노무현 대통령 국회 탄핵안 통과를 반대하는 촛불시위가 격렬해졌던데 대해서도 나무랐다. 당시 탄핵반대 시위는 “정권방송”들의 선동과 운동권세력의 주도속에 격화되어갔다. 김 추기경은 그해 3월21일 “탄핵문제로 국론이 분열돼서는 안된다.”며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차분하게 기다려보자”고 자제를 촉구 하였다.

여기에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고문이며 좌편에 서 왔던 함세웅 신부는 김 추기경을 정면으로 비판하였다. 그는 김 추기경의 “참으라는 말씀은 불의의 독재시대에 권력자들이 늘 하던 표현이다.”며 김 추기경을 독재 권력편에 선 것으로 3월말 폄훼하였다. 뿐만아니라 그는 김 추기경의 “사고는 다소 시대 착오적이라고 판단된다.”고 반박하였다. “시대착오적”이란 말은 김 추기경이 당시의 친북좌익편에 줄서지 않았다는 비방이었다.

하지만 김 추기경의 자유민주체제 수호의지는 한낱 좌편향 신부의 폄훼로 막힐 수 없었다. 그는 그로부터 반년만인 9월14일 친북좌익 정권의 국가보안법 폐지 기도를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국보법의 인권침해 조항을 개정하는데는 이의가 없지만 “보안법 자체의 폐지에는 반대한다.”고 잘라 말 했다. 그 이유로는 북한의 남한 “적화통일 사상 체제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김 추기경은 “종교는 아편”이라고 탄압하는 공산주의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반공에 기초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체제를 진정으로 사랑하였다. 그래서 김 추기경은 이명박 대통령이 좌익 정권을 몰아내고 자신을 작년 성탄절 날 문병하자. “이 대통령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 참 힘이 난다.”며 밝은 표정을 지었다. 김 추기경은 좌익정권 시절 늘 걱정했던대로 “아직도 불안한” 상태가 아니라 “참 힘이 난다”는 밝은 마음으로 16일 선종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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