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언론의 실체적 역사는 개화기였던 구한말에 ‘독립신문’이 발간되고부터 일 것이다. 당시 기자를 고원(告員)으로 불렀고 발로 뛰며 신문을 팔았다. 그때도 기사에 불만품은 세력이 신문을 해코지 하는 사건은 노골적으로 일어났다. 고원이나 신문 판매원들에게 폭행을 가하고 달아나는 ‘꼭지떼’의 등장이 그것이다.
꼭지떼는 소외받는 전과자들을 중심으로 청계천변에 움막을 짓고 거지 행세로 서민들에게 공포감을 주던 부랑배 집단이었다. 돈만 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무리들이었다. 당연히 청부 폭력을 일삼았을 만하다. 비판기능과 고발 기사를 생명으로 하는 신문의 험난한 앞날이 이렇게 예고 됐다. 어쩌면 정치권력이나 금권의 언론탄압 역사는 훨씬 오랜 세기 전부터였는지 모른다. 신라 때 진성여왕의 난잡한 사생활을 고발하는 은어서가 나돌아 여왕이 역사(力士)들을 보내 테러 보복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신라 경문왕의 지나친 호색을 고발하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라는 참요가 나돌았을 때 노래의 진원지였던 ‘도림사’ 일대를 쑥밭으로 만든 일화가 전해진다. 조선왕조 숙종 때 인현왕후 민씨가 복위하기까지 ‘장다리는 한철이요 미나리는 사철이라’는 참요가 민비 쪽으로 민심 모아지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런 점에서 비판언론은 언제나 보복 당할 각오를 가져야 했다. 꼭지떼나 해방 후 깡패 양아치 집단이 발호 할 때는 그래도 낭만 있는 시대였다. 군사정권 때의 당근과 채찍을 조화시킨 언론 길들이기는 어용기자 전성시대를 만들었다. 민주화 후에는 정권의 색채가 신문사 운영의 희비를 갈라놓았다. 한국 언론의 숙명적 애환이었다.
언론 개혁이니 어쩌니 해서 정권이 언론 편 가르기에 골몰했던 이유가 자명했다. 비판언론의 예봉을 꺽으려는 수작이었다. 별 방법을 다 동원했다. 신문시장의 어려움을 틈타 호의적인 신문에는 광고 지원으로 기를 살리고 공격하는 언론은 재정난을 가중케 하는 수법이었다. 이를 방어하는 일이 여간 힘들지가 않은 것이다. 자금난 속에 추가 될 소송비용이 큰데다가 거물급 변호인단을 상대해서 재판에 지면 물어줘야 할 돈이 엄청나다.
이런 식의 빚을 안고 있는 신문사가 한 둘이 아닌 실정이다. 기업 법무팀이 하는 일 가운데 언론 상대 소송작업이 주 업무가 된 지경이다. 돈 많은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불리한 기사가 나오면 소송하는 방법으로 해당 언론사는 물론 타 언론까지 재갈을 물리려고 하는 버릇들이 지난 좌파 정권 때 부터였을 것이다.
지금 시장 사정은 언론이 제 살 뜯기를 할 정도로 상황이 매우 어렵다. 그런 만큼 자칫 비판 신문이 제 구실을 못하고 가진 편에 빌붙는 비애적 사건이 자주 발생할 수 있다. 그럼 ‘유전 무죄, 무전 유죄’에 ‘유전 정의, 무전 불의’사회 될 날도 멀지 않겠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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