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올림픽 개막 쇼와 평양 아리랑 공연
베이징 올림픽 개막 쇼와 평양 아리랑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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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8-09-02 11:20
  • 승인 2008.09.02 11:20
  • 호수 749
  • 17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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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8일 저녁 9시 베이징 올림픽의 주 경기장인 냐오차오(鳥巢)에서 열린 개막식은 지상 최대의 쇼 였다. AP통신이 보도한 대로 ‘올림픽 사상 가장 크고 화려한 쇼’였다.

연거푸 그라운드에 몰려드는 수천명의 출연자들을 보면서 6.25 북한 남침 당시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연상케 했다. 베이징 쇼는 13억 중국의 인적 자원과 값싼 노임, 공산주의 일당독제체제, 최첨단 기술, 세계 최대 외환 보유국으로서의 재력, 등이 함께 어우러져 만든 종합 작품 이었다. 개막식을 위해 무려 1억달러(한화 1050억원)를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21세기 최대 지상 쇼를 총 지휘한 사람은 중국 영화계의 대부인 장이머우(張藝謀) 영화감독 이다. 수십억 세계인들을 감동케 한 베이징 쇼는 장 감독의 자유분방한 내면 표출이었다. 그의 아버지와 삼촌은 공산당에 저항한 자유주의자 였다. 그는 문화혁명 당시 18세 나이로 강제노역에 처해졌다.

그는 ’붉은 수수밭‘ ’홍등 인생‘ 등 중국 사회주의 체제의 빈곤과 실정을 고발하는 작품을 과감히 다뤘다. 그로인해 그는 탄압을 받아야 했다. 그가 미국의 아카데미 상 후보에 오르자 공산당은 수상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하기도 하였다.

베이징 쇼를 보면서 오늘의 중국이 공산당 일당 독재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로 변신할 수 있었던 동력을 감지할 수 있었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자국민들에게 경제적 풍요와 정신적 환희를 즐길수 있도록 상당부분 자유와 창의성을 허용하는 여유를 가졌다는 것이 그것이다.

여기에 북한의 ‘아리랑‘ 집단체조가 비교되지 않을 수 없다. ’아리랑’은 규모 면에선 베이징 쇼를 압도했다. 연인원 10만명이 동원되었고 ‘아리랑’ 공연의 ‘5.1 경기장’은 15만명의 관람객을 수용할 수 있다. 9만1000명 수용의 나오차오 경기장 보다 크다.

‘아리랑’은 북한 주민들이 즐기도록 제작된 것은 아니었다. 죽어서도 국가 주석 자리를 꿰차고 있는 김일성의 90회 생일을 위해 만든 집단체조 였다.

북한은 집단체조가 ‘청소년들과 근로자들을 주체사상으로 무장시키며 조직성, 규율성, 집단주의 정신으로 교양하는 동시에 그들의 몸을 튼튼히 단련하는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자랑한다. ‘아리랑’ 집단체조의 줄거리는 일제 시대 나라를 빼앗긴 비참한 모습, 백두산에서 장군별(김일성)이 솟아오르는 광경, 김일성의 업적 표출, 등을 내용으로 담았다.

베이징 쇼 처럼 화려하고 생동감 넘치지 못하였다. 오직 기계적이며 살벌할 뿐이었다. 대규모 집단체조의 기계적인 율동의 반복이었을 뿐이다. 김일성·김정일 부자 세습체제와 선군정치를 위한 붉은 선전물에 지나지 않는다.

북한 당국은 베이징 올림픽 경기에 출전시킨 선수들에게도 “장군님 만세” 학습을 단단히 시켰다. 역도에서 금메달을 딴 박현숙 선수는 김정일 “장군님이 경기를 지켜본다는 생각을 하니 힘이 솟아오르면서 바벨을 들어올릴 수 있었다.”고 했다. 다른 선수들도 베이징에서 ‘장군님’을 입에 달고 다녔다.

하지만 그 알량한 놈의 ‘장군님’은 영구 집권을 위해 “개혁·개방은 망하는 길”이라며 폐쇄하고 수백만명을 굶겨죽였다. 수십만명을 정치범 수용소에 가둬두고 있다.

그런 지독한 독재자 밑에서는 장이머우 같은 감독이 나올 수 없다. 베이징의 화려한 쇼와 평양의 기계같은 ‘아리랑’과의 차이는 개방과 폐쇄에 있다. 북한은 개방을 두려워 말고 중국 처럼 개혁에 과감히 나서야 한다. 그게 ‘“망하는 길’이 아니라 ‘흥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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