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검찰·재계·언론이 유착되어서는 안 된다. 그 대목엔 공감한다. 그러나 검찰·재계·언론은 노대통령의 주장대로 ‘특권구조’나 ‘특권집단’이 아니다. 그들은 자유민주체제에서 필수불가결한 국가 조직체들이다. 그들은 각기 독자적 역할을 맡고 고유의 몫을 해내는 다원주의 민주사회의 복합체제들 중 일부이다.
주지하다시피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은 사회적 다원주의와 복합적 복수체제에 기초하고 있다. 검찰·제계·언론은 물론이려니와 노조·종교단체 등 여러 상충되는 그룹들이 획일적으로 집권자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경쟁을 벌이며 보완 발전해간다.
그렇지 않고 조직체와 그룹들이 권력의 시녀처럼 대통령의 지령에 따라 움직인다면, 그것은 반민주적 독재체제이다. 그런 맥락에서 노대통령이 검찰·재계·언론을 특권집단이라며 해체해야 하고 그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을 거부한 독재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노대통령은 다원사회의 필수 조직체들을 ‘특권집단’이라고 몰아붙임으로써 사회구조를 지배와 피지배의 계급적 대결구도로 인식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그가 시대착오적 지배와 피지배의 계급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게 아닌가 의심케 한다.
특히 노대통령은 언론이 “아침저녁으로 관점을 바꿔가면서 두드린다”고 불평했는데, 이것 또한 이해 할 수 없다. 원래 언론의 사명은 아침저녁으로 권력이나 사회의 문제점들을 두드리는 데 있다. 그래서 ‘목탁’이라고 한다. 노대통령이 언론의 날카로운 비판을 거부한다는 것은 그의 반민주적 언론관을 노정시킨 것으로 보인다.
특히 노대통령은 비판적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대해서는 험담을 삼가지 않으며 적의마저 내뿜는다. 그 대신 언론으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대통령의 친북좌파 코드에 따라 춤을 추는 KBS 등 ‘정권방송’에 대해선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심지어 그는 사 내·외에서 편파 무능 권력시녀 등으로 비판받고 배척되어온 정주년 KBS 사장의 재임명을 고집, 관철시켰다. 이쯤되면 이것은 독재적 발상이라기보다는 그의 분별력과 이성을 의심케 하기에 족하다.
분별력을 결여한 노대통령의 몰이성적 고집은 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의 작가·평론가였고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조지 버나드 쇼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영국 아일랜드 출신인 쇼는 “이성적인 인간은 자신을 세상에 적응시키는데 반해, 사리를 분별할 줄 모르는 몰이성적인 사람은 세상이 자신에게 적응토록 고집한다”고 했다.
노대통령은 검찰 재계 언론이 자신의 코드에 맞춰 적응토록 고집한다. 쇼의 지적대로 그는 자유민주주의 세상에 적응하는 게 아니라 세상이 자신에게 적응토록 주장한다. 그가 스스로 충동적 감성에 사로잡혀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몰이성적 고집으로 인해 대통령으로서 참담하게 실패했음을 직시, 세상에 적응하는 이성과 지혜를 터득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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