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어렵게 태평로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오 전 위원장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먼저 김 전 회장이 최근 검찰에서 밝힌 내용부터 반박했다. 김 전 회장은 최근 검찰조사에서 “채권단과 임원진의 권유로 출국하게 됐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오 전 위원장은 김 전 위원장의 이같은 발언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가 털어놓는 일화 한토막. 대우그룹의 구조조정 작업이 한창이던 지난 99년 8월, 평소 안면이 있던 대우 계열사 사장 몇 몇이 잇따라 오 전 위원장을 찾았다. 김 전 회장이 청와대만 믿고 경영권에 집착을 보이니 말려달라는 것이었다. 며칠 후 서울 힐튼호텔에서 김 전 회장을 직접 만났다. 이 자리에서 오 전 위원장은 김 회장에게 대우의 강력한 구조조정을 주문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정부가 나서서 처리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이같은 말은 전혀 먹히지 않았다. 오히려 워크아웃 기업 중 6곳을 넘겨달라는 등 강한 경영권 수호 의지를 내비쳤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힐튼호텔서 “워크아웃 기업 6곳 넘겨라” 엄포
그는 <일요서울>과의 단독인터뷰에서 “김 전 회장은 ‘대통령도 워크아웃 기업 중 6곳은 남겨주기로 약속을 했다’면서 나에게도 이같은 약속을 요구했다”면서 “그런 그가 채권단의 권유로 출국했다는 말은 납득이 안간다”고 꼬집었다. 그는 세간에 나돌고 있는 ‘대우 타살설’에 대해서도 “비약이 지나친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당시의 김 전 회장은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면서 전세계를 누비던 김 전 회장의 리더십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경영권에 집착해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없을 정도로 변질돼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대우 패망의 단초가 됐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당시 김 회장의 집무실에서는 큰 소리가 가실 날이 없었습니다.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한 일부 임원들이 김 회장에게 직언을 한 것이지요. 그러나 결론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김 회장이 화를 내면서 ‘야! 이 자식아 내가 알아서 한다는데 왜 말이 많아, 하라는 대로 해’라고 하면 끝이었습니다. 대우의 패망 이면에는 김 전 회장의 이같은 제왕적 리더십이 숨어 있습니다.”그는 대우그룹의 해외 비밀금융조직인 BFC(British Finance Center)를 통해 빼돌려진 200억달러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하고 있다. “처음에는 순수 목적으로 BFC를 운영했겠지요. 당시에도 상당수 국내 기업들이 BFC와 비슷한 조직을 운영했으니까요. 문제는 세계경영을 하면서 터졌습니다. 액수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처음과는 멀어진 것이지요. 나중에 조사해 보니 60%는 변칙회계를 통한 비자금으로, 나머지 40%는 금리 부담으로 쓴 것으로 나타났습니다.”그는 DJ와 김 전 회장간의 ‘끈끈한’(?) 관계에 대해서도 귀띔했다.
97년 대선과정에서 김 전 회장이 DJ를 앞장서 지원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김 전 대통령도 정권을 잡은 후 누구보다 김 회장에게 각별하게 대했다. 김 전 회장이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에 오르는 데 DJ의 숨겨진 힘이 작용했다는 소문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 ‘김우중 구출작전’ 팔 걷어붙이나
- 옛 대우맨들, 잇따라 대우 계열사 인수 선언
김우중 회장이 귀국해 검찰 조사를 받고 있는 가운데, 옛 대우맨들이 잇따라 대우 계열사 인수에 나서 눈길을 끌고 있다. 대우건설, 대우인터내셔널, 대우캐피탈 등 우량 계열사를 중심으로 대우인들간 인수 경쟁이 본격화되고 있는 것. 물론 당사자들은 “오랫동안 준비해온 프로젝트”라면서 확대 해석을 경계하고 있다. 그러나 재계를 중심으로 이들이 ‘김우중 구하기’에 본격적으로 팔을 걷어붙인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김우일 전 대우그룹 구조조정본부장(현 대주그룹홀딩스 대표)이다. 김 전 본부장은 현재 군인공제회, 기관투자가, 국내외 사모펀드 등과 함께 컨소시엄을 구성, 대우건설과 대우인터내셔널 인수를 준비 중이다.(본지 576호 보도) 김 전 본부장은 “M&A의 ‘큰손’으로 꼽히는 군인공제회를 비롯해, 40여개의 중견 기업, 국내외 사모펀드로부터 2조원 가량의 실탄을 확보한 상태다”면서 “매각 공고만 나면 바로 입찰에 응할 준비가 돼있다”고 말했다.
대우자동차판매의 최대주주인 아주산업과 신한은행 컨소시엄도 이달 중으로 대우캐피탈 인수 본계약을 체결할 예정이다. 대우자동차판매는 김우중 전 회장의 비서 출신인 이동호씨가 사장으로 있는 회사이기 때문에 눈길을 끌고 있다. 사모펀드 결성을 통한 간접적인 대우계열사 인수작업도 활발히 진행 중이다. 지난 2000년 5월까지 대우증권 상무를 지냈던 손복조 대우증권 사장은 올 상반기까지 2,000억원 규모의 사모펀드 설립을 추진 중이다. 이렇게 해서 우량 대우 계열사 인수에 적극 참여한다는 복안이다. 이밖에도 ㈜대우 출신의 몇몇 인사도 오는 9월 매각 완료를 목표로 진행 중인 대우정밀 매각에도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옛 대우인들간의 교류도 점차 활발해지고 있다.
지난해 10월말 경기 포천 아도니스 골프장에서는 이동호 대우자동차판매(대우자판) 사장, 김충훈 대우일렉트로닉스 사장 등 옛 대우그룹 계열사들의 최고경영진 20여명이 모여 골프회동을 가졌다. 당시 참석자들은 침체된 자동차 내수를 타개하기 위한 모임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어려운 때일수록 옛 식구끼리 서로 돕자’는 취지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룹 해체 이후 옛 계열사 CEO들은 거의 한자리에 모인 적이 거의 없었다. 때문에 김 회장의 귀국을 계기로 이들의 단합이 본격화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한 대우그룹 관계자는 “의도됐건, 아니든간에 김 회장의 귀국으로 옛 대우인들의 왕래가 활발해진 것이 사실”이라면서 “그러나 김 전 회장을 구하기 위한 의도는 전혀 없다”고 해명했다.
이석 suk@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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