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나 언론 또는 학자들은 남북관계가 꼬이면, 북한 ‘강경파’의 입김, 아니면 ‘군부’의 반대 때문이라고 탓하는 경향이 있다. 북한이 경의-동해선 열차 시험운행 약속을 24시간 앞두고 전격 취소해 버리자. 저것을 두고도 많은 사람들이 군부의 반대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그러나 북한 권력에는 ‘군부’ 목소리란 있을 수 없고, ‘강경파’나 ‘온건파’도 상상할 수 없다. 오직 존재하는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 하나 뿐이다. 북한에서는 모두가 김의 지시에 맹종하거나 미리 감을 잡아 알아서 앞장 설 따름이라는 데서 그렇다. 북한이 12일 남북연결 열차 시험운행에 합의했다가 24일 취소한 것도 군부의 독자적 반대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남한의 돈 맛을 안 김정일이 김대중 전대통령의 6월 방북 교섭을 놓고 더 얻어내기 위해 시간 끌며 애먹이기의 일환일 뿐이었다. 김정일은 군 간부들이 자신을 로마의 네로 황제처럼 섬기도록 엄하게 길들여 놓았다. 조폭의 두목과 부하 관계를 연상케도 한다. 그 같은 모습은 지난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과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정상회담 석상에서 비무장지대의 중상비방방송 중지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 때 김정일이 배석하고 있던 조명록 국방위 부위원장에게 반말 투로 “비방 중지 했지”라고 물었다. 그러자 조명록은 벌떡 일어나 부동자세로 “남과 협의하여 중지하겠습니다”고 답변했다. 여기에 김은 그에게 손가락질하며 언성을 높여 “속히 하라”고 소리쳤다. 그 말에 조는 물잔을 들고 있던 손을 벌벌 떨었다고 한다. 조명록은 당시 70세로 6·25남침 땐 조종사였고 공군총사령관을 지냈으며 김정일 보다 12살이나 위였다. 저 장면이 바로 북한 권력에 군부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벌벌 떨 따름임을 반영하기에 족하다. 군부는 안보를 이유로 감히 군사보장합의서 채택을 거부할 수 없고, 김의 속내 대로 집행했을 따름이었다. 그밖에도 김정일은 정상회의가 끝날 무렵 목청을 돋구어 반말투로 소리쳤다. “국방위원들 다 나와 인사드리라!” 국방위원들을 마치 졸개 처럼 대하고 있음을 나타낸 말투였다. 물론 김정일은 “선군정치”(先軍政治)를 외쳐대며 “내 힘은 군력에서 나온다”고 공언한다. 그가 군국주의를 표방하고 있음을 드러낸 말이며 군부에 끌려다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북한에서 온건파와 강경파가 서로 갈등을 빚는다는 해석도 황당한 얘기가 아닐 수 없다. 강경파나 온건파도 군부와 똑 같이 김의 말 한 마디에 벌벌 떨 따름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측 요원들 마저 가끔 남측 인사들에게 “군부가 반대해서” 라는 말을 흘려보낸다. 그 저의는 다른데 있지않다. 김정일은 남북관계 화해를 위해 노력하는 ‘민족의 태양’인데, 몹쓸 군부가 제동을 건 탓이라고 돌려대기 위한 기만선전술이다. 한편 남한에서도 남북관계가 긴장 국면으로 치달으면, 으례 정부측에서는 북한의 군부나 강경파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 언론매체들이나 학자들은 그 말을 복창한다. 정부측에서 그렇게 둘러대는 저의도 뻔하다. 남북관계는 대북 퍼주기로 잘 되어가고 있는데, 북한 군부나 강경파가 발목을 잡기 때문이라고 핑계대기 위한 것이다. 그런 핑계는 국민을 속이고 남북관계를 왜곡하며 끝내 중대 위기를 자초할 수 있음을 환기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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