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나라의 명운이 걸린 큰 사건들을 다루면서 동네 북처럼 이리 얻어맞고 저리 터져 만신창이가 되었다. 남한테 뭇매를 맞게 되면 동정을 사게 마련인데, 헌재의 경우 얻어맞아 싸다는 쾌감을 일부 국민들 사이에 자아내기도 했다. 작년 5월 헌재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심판을 기각했을 때는 헌재 재판관들이 집권세력에 의해 ‘헌법 수호자’라고 극찬을 받았다. 탄핵안을 주도했던 민주당과 한나라당도 헌재가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결정했지만, 헌재의 결정을 “겸허히 존중한다”며 존중의 뜻을 표했다. 하지만 헌재는 그로부터 5개월만인 작년 9월 노정권의 신행정수도건설 특별법을 위헌이라고 결정했다가 집권세력에 의해 박살났다. 천정배 원내대표는 “헌법 자체가 훼손됐다”고 반격했다. 그는 5개월 전 헌재가 탄핵안을 기각했을 때 “헌재 재판관들에게 경의를 표한다”고 칭송했던 사람이다. 그밖에도 집권세력은 헌재를 “헌법을 훼손하고 낡은 기득권층을 대변하는 오만방자한 집단”, “헌재 재판관들을 탄핵하겠다”고 협박까지 했다.저같은 집권세력의 뭇매를 맞으며 재판관들은 야당과 집권세력의 근본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추측된다. 야당은 헌재가 자신에게 불리한 결정을 내렸을 때도 그 결정을 “존중한다”고 했는데 반해, 집권여당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결정해주면 수호신이라고 떠받들었다가도, 불리하게 되면 금방 돌아서서 마구 욕설을 퍼붓고 나선다는 것, 그것이다. 헌재는 그로부터 11개월만에 또 다시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이번엔 집권세력의 좌파 코드에 맞춰 결정을 내린 게 화근이었다. 부산 동의대에서 과격학생들의 시위를 진압하다가 학생들에 의해 살해당한 경찰 유족들이 낸 헌법 소원을 헌재가 기각한데 대한 반발이었다.2002년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는 동의대 도서관에서 계획적으로 석유를 뿌려놓은 다음 화염병을 던져 경찰을 7명이나 죽인 시위학생들을 ‘민주화 운동자’로 인정한바 있다. 7명의 경찰 희생자 유가족들은 경찰 살해자들을 ‘민주화 운동자’로 인정한 것은 위헌이라고 헌재에 소를 제기했다. 하지만 헌재는 10월27일 뜻밖에도 유족들의 헌법 소원을 기각해 버렸다.헌재가 기각 결정을 내리자, 한 경찰 유가족은 울먹이며 “경찰관을 죽인 자라도 국가유공자라면 앞으로 어느 경찰관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일을 할 수 있나. 세상에 이런 법은 없다”고 울분을 터뜨렸다. ‘나라사랑어머니연합’은 “헌재와 민주화보상심의위는 인권타살 공범”이라고 했다. ‘국민행동본부’는 신문광고문을 통해 헌재는 “남한의 친북정권이 김정일과 야합하여 연방제통일을 추진해도 적화통일이 합헌이라는 결정을 내리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통박했다.헌재가 집권세력의 코드에 맞춰 헌법 소원을 기각한 배경은 두어 가지중 하나로 추측된다. 헌재는 11개월 전 집권세력에 불리한 결정을 내렸다가 혼났던 것을 기억한다. 그래서 헌재는 집권세력 코드를 거부했다가는 또 보복당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손을 들어준 것이 아닌가 한다. 아니면 헌재가 어느새 집권세력의 좌파 코드에 길들여진데 연유한 것으로 짐작되기도 한다.차제에 지난 6월 김영일 전 헌재 재판관이 술회한 말 한 대목이 떠오른다. 그는 “대통령이 개혁한다며 입법 사법 행정 다 건드리고 온갖 제도와 절차를 다 뒤집고 있는데 헌재라고 영향을 안 받겠느냐”고 했다. 헌재 재판관들이 대통령의 온갖 뒤집기에 영향을 받았다면, 그들은 3권분립 의무를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민주화보상심의위와 함께 ‘인권타살 공범’이란 낙인을 면키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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