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을 정점으로 400여명의 비서실 직원들이 국가를 움직이는 대한민국의 심장부다. 참여정부들어 노무현 대통령이 권력을 분산시켰다고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모든 권력은 청와대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청와대 권력은 ‘똥통 사건’이나 ‘청소원 사건’처럼 희화화되면 안된다. 청와대가 권력을 어떻게 행사하는지에 따라서 국민생활이 크게 좌우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진지하고 신중하게 다뤄야 한다. 그럼에도 현실에서는 가끔 엉뚱한 곳에서 권력이 활개를 친다. 과거 청와대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었고, 지금은 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일요서울’은 우리 헌정사의 주요 고비 때마다 권력의 심장부에서 대통령을 중심으로 발생했던 일들을 되돌아 보고, 오늘에 되새기기 위해 ‘청와대 25시’를 기획 연재한다. ‘청와대 25시’는 매주 발생한 정치현안 가운데 가장 이슈가 되는 주제를 잡아 뒷 얘기를 소개하고, 과거 정권에서 있었던 그와 유사한 사례를 알려지지 않았던 후일담 형식으로 설명한 뒤, 역대 정권과 현정권을 비교 평가하게 된다.
필자는 청와대를 비롯해 정치권을 오랫동안 출입한 현직 언론인이다. 권력의 심장부에서 직접 보고 들은 일화들과 전·현직 정치부 기자 및 청와대 참모들을 다각적으로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참여정부 출범 2주년(2월25일)을 맞아 연재를 시작한다.“대통령의 눈꺼풀 수술은 심기일전의 의미가 있다.”노무현 대통령이 윗눈꺼풀이 처지는 ‘상안검 이완증’ 수술을 받은 눈을 보호하기 위해 안경을 착용하고 2월17일 청와대의 재외 공관장 초청 만찬장에 나온 모습을 보고 청와대 관계자가 한 말이다.앞서 노무현 대통령의 수술 사실이 공개되자 안티그룹 쪽에선 여러 가지 비판이 나왔다.청와대가 노 대통령이 지난 2월4일 청와대 의무실에서 서울대 의료진의 시술로 수술을 받았고, 설 연휴가 끝날 즈임인 10일부터 2박3일 동안 제주도에서 가족들과 함께 휴식을 취했다고 공개한 것은 지난 13일.(물론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엠바고’를 전제로 대통령의 제주도 휴가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청와대의 이런 공개에 앞서 10일에 북한 외무성의 핵 보유 및 6자회담 무기한 불참 선언이 나왔다.
이에 따라 “북한 핵 위기가 심각한데 대통령은 ‘쌍꺼풀 수술’(상안검 이완증 수술로 쌍꺼풀이 생겼다)이나 하고, 제주도에서 휴가나 보내고 있었느냐”는 비판이 쏟아졌다.청와대로서도 곤혹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했지만 마침 취임2주년을 앞두고 있는 만큼 임기 중반기를 맞아 에너지 재충전의 의미로 해석해 달라면서 겨우 겨우 넘어갔다. 현재 대한민국 대통령의 임기는 5년이다. 따라서 취임 2주년이 되는 해는 임기의 꼭 중반부에 해당하는 시기로, 대통령과 비서실 모두 가장 의욕적으로 일을 추진하곤 한다. 그런 반면에 정치적으로나, 경제·사회적으로 대형 이슈가 많이 터져나와 위기를 겪는 것도 역시 이 시기다. 정치권의 한 인사는 “역대 대통령 누구나 임기의 반환점을 도는 시기에 큰 어려움을 경험했다”며 “국정운영 지지도 조사에서도 항상 중간 시점에 바닥을 치는데, 이는 ‘집권 중반기 신드롬’으로 불릴 만할 정도”라고 말했다.노무현 대통령이 취임 2주년을 며칠 앞두고 앞서 설명한 구설수에 오른 것도 이런 신드롬의 시작일 것이라고 이 인사는 해석했다.
취임 중반기를 맞은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 화두는 ‘선진한국’과 ‘혁신’이다. 선진한국 실현을 위한 핵심 과제가 혁신인 셈이다. 청와대는 2월 들어 김우식 비서실장을 중심으로 ‘혁신추진팀’을 운영하고 있으며, 혁신수석비서관을 두는 방안도 강구 중이다. 대통령 비서실장 외에 정책실장, 업무혁신비서관, 업무조정비서관, 총무비서관 등이 참여하는 혁신추진팀은 2월17일 첫 모임을 갖고 노무현 대통령이 25일 취임 2주년 국회연설에서 제시할 국정운영 기조를 검토했다.김우식 실장은 참여정부의 새 화두인 혁신을 ‘발전을 위한 변화’, ‘성과 극대화를 위한 변화’라고 정의하고 “정부부처부터 시작된 혁신 바람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우식 실장은 격주에 한번씩 각 수석실별로 혁신 사례를 보고토록 했다. 혁신이 단순한 구호에 그치지 않고 현장에서 실천되고 있는지 점검하겠다는 의미다.노 대통령이 구상하는 혁신의 요체는 25일 국회 연설문에 포괄적으로 담긴다.
이날의 대국민 메시지를 위해 2월 중반부터 시작될 예정이던 정부 각 부처별 새해 업무보고마저 일제히 뒤로 미뤘다.노 대통령이 새해 국정목표를 혁신으로 자리잡은 것은 그만큼 ‘집권 중반기 신드롬’에 시달리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은 무엇보다 사회 각 분야에서의 갈등이 심각한 시점이다.먼저 ‘이기준 교육부총리 인사 파동’으로 새해 벽두부터 휘청거렸다. 이 때문에 여러가지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고위 정무직 인사를 할 때 미리 복수의 후보를 공개해 여론의 검증을 거치도록 하는 인사 혁신 방안을 내놓아야 했다.정치적으론 여당인 열린우리당 소속 의원들의 잇단 금배지 박탈로 오는 4월30일 치러질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가 끝나면 과반수 의석이 무너져 안정적 국정운영에 큰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경제 상황도 그다지 개선되지 않고 있다. 경기가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서민층은 여전히 냉기를 느끼는 등 양극화 현상이 심화돼 오히려 정부 불신의 요인이 되고 있다.
집권 중반기, 골치아픈 신드롬에 시달리기는 역대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전임자인 김대중 대통령의 경우 취임 2주년을 하루 앞둔 2000년 2월24일 ‘DJP 공동정부’의 한 축이던 자민련이 내각제 약속 불이행을 이유로 ‘공조 파기’ 선언을 해버렸다. 16대 총선(4월13일)을 눈앞에 두고 나온 이 선언으로 국민의 정부는 정치적으로 일대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경제적으로는 외환위기 극복의 공로를 인정받은 시점이었지만 대북 관계에선 현물 지원 정책으로 ‘대북 퍼주기’ 시비에 휘말려 있었다.당시 청와대 비서실에서는 “‘머피의 법칙’(일이 좀처럼 풀리지 않고 갈수록 꼬이기만 하는 경우에 쓰는 용어)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다”는 탄식이 나왔다.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 2주년을 맞은 1995년 2월25일을 전후해서는 6월의 4대 지방선거를 예정대로 실시할지를 놓고 정치권에서 논란이 일어났다. YS는 특유의 돌파력으로 고비를 넘겼지만 여권내 보수세력의 선거 연기 압력에 시달렸다.
이 시점에 재벌개혁 정책도 강력하게 추진했지만 이 역시 강한 저항에 부딪쳐 문민정부의 전반적인 개혁 드라이브에 차질이 생겼다. 또 이 시기에 1992년 대선 패배 후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김대중씨가 아태평화재단을 설립, 정치적 현안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해 YS의 속을 긁었다.YS의 독선적 성격이 진가를 발휘해 정치권에서 ‘문민독재’란 지적을 받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보통사람들의 시대를 표방한 노태우 대통령의 임기는 1988년 2월25일 시작됐다. 2년이 흐른 1990년 2월 노태우 대통령은 정국안정을 위해(어쩌면 정권연장을 위해) 그해 벽두 단행했던 ‘민정·민주·공화 3당 합당’의 극심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내각제 개헌을 둘러싼 YS와의 밀약설이 불거진데다, 민주·공화계가 내각 등에서의 지분을 요구하는 바람에 일대 곤욕을 치른 것이다.당시 청와대 비서실 사람들은 한창 자기들끼리 권력의 단맛을 만끽하고 있는데 ‘이방인’(민주당과 공화당 출신)들이 하나 둘씩 자리를 꿰차고 들어오자 불만이 가득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대통령 임기가 2월25일부터 시작된 것은 12대 전두환 대통령 때부터다.1980년 9월1일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체육관 선거’를 통해 11대 대통령에 취임한 전두환 대통령은 헌법을 바꿔 1981년 2월25일 대통령선거인단 선거에 의해 12대 대통령으로 선출돼 취임식을 가졌다.전두환 대통령은 취임 2주년이 된 1983년 2월25일 별도의 성대한 기념식을 갖지는 않았지만 신군부가 정치행위를 규제했던 정치인 가운데 250명을 2년4개월만에 1차로 해금하는 조치를 취했다. 또 같은 날 북한의 이웅평 상위가 미그25기를 몰고 귀순하는 당시로선 ‘경사’가 있었다.그렇지만 그 해에 가택연금을 당하고 있던 YS가 광주민중항쟁 3주기(5월18일)를 맞아 23일간의 긴 단식투쟁을 벌이는 바람에 구속 정치인을 대거 석방해야 하는 등 정치적 위기에 몰렸다.뿐만 아니라 9월1일에는 대한항공여객기가 소련 영공에서 격추 당해 269명 전원이 사망하는 사건으로 한반도에서 긴장이 고조되더니, 10월9일 버마를 방문했다가 아웅산 묘소에서 폭탄테러를 당하는 위험을 겪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3공화국을 출범시킨 뒤 3년째 되는 해인 1965년에는 정치인들이 워낙 숨을 죽이고 있던 때라 이렇다 할 정치적 사건은 없었지만, 한국군 베트남 전쟁 파견 결정(1월8일), 한일기본조약 조인(6월22일) 등 대외적으로 큰 일이 있었다.정부 수립에 의해 1948년 7월24일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승만 대통령은 취임 2주년을 한 달 앞두고 6·25 전쟁을 맞아 피란 길에 올라야 했다. 한국군 작전권까지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에게 위임해야 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군의 반격으로 그 해 10월30일 ‘평양시민 환영대회’에 직접 참석하는 영광을 누렸지만 다음 해 1·4 후퇴가 있었다.“그간 참여정부에 대한 오해가 많았다. 좌파정부, 포퓰리즘, 나토(No Action, Talk Only)정부, 이념과잉 정책결핍, 개혁조급증이라는 등 비판이 있었고 여전히 오해가 남아 있다.”참여정부 청와대 김병준 정책수석이 전반기 2년 국정운영을 되짚어보며 한 말이다. 지금부터라도 그런 오해를 불식시키는 데 노력해 정권의 중반기 신드롬을 옛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유제성<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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