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 ‘돈 가뭄’ 비상, 자금양극화 심화

중견·중소기업들에 돈이 돌지 않는 ‘돈맥경화’ 현상이 심각하다. 유럽 재정위기와 전 세계적인 경기침체 영향이 장기화될 수도 있다는 전망에 대비하기 위해 대기업들은 차입, 회사채 발행, 유상증자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현금을 끌어 모으고 있다. 이에 반해 중소기업들의 현금 수요는 늘고 있지만 제도권 대출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금융위기 우려가 확산되고 가계부채 증가를 억제하기 위한 정책들이 시행되면서 은행들이 대출 문턱을 앞 다퉈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중산층이 붕괴되고 2008년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서민들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기업들 간 유동성에 대한 양극화도 본격화되는 형국이다. 이에 [일요서울]이 중소기업 자금난 악화와 대기업들의 ‘현금 싹쓸이’ 현황에 대해 짚어봤다.
기업들의 자금 사정이 급속히 악화되며 유동성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경기가 완만하게나마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로 투자를 늘렸으나 경기가 예상대로 호전되지 않아 예상 수익을 내지 못한 것이 자금 악화의 주원인이라는 지적이다.
더욱이 경기불황에 상대적으로 취약한 중견·중소기업의 사정이 더 나쁘다는 점이 문제로 떠오른다. 이들 기업은 자금난을 해결하기 위해 차입, 채권발행, 증자 등에 나서고 있으나 성과는 매우 저조하다.
지난 3일 한국상장사협의회와 금융감독원 등에 따르면 유가증권시장에 상장된 12월 결산법인 632개사의 지난 6월 말 기준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은 48조1330억 원으로 지난해 말 52조940억 원보다 7.6% 감소했다.
특히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이 50% 이상 감소한 128개사 가운데 대기업은 10개사에 불과했고 나머지 118개사(92.2%)는 중소기업인 것으로 나타났다.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이 30% 이상 감소한 상장사는 34.0%인 215개사였고 70% 이상 감소한 회사는 9.3%인 59개사였다. 현금성 자산 감소율이 70%가 넘는 59개사에서도 대형주에 해당하는 기업은 NHN(-73.98%)과 현대백화점(-94.85%) 2개사에 불과했고 대부분은 중소기업이었다.
보유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이 10억 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장사도 모두 중소기업이다. 한 소형 상장사는 영업활동에서 279억 원이 빠져나가면서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이 지난해 말보다 97.3% 감소한 152만 원을 기록했다.
중소기업의 현금 수요는 늘고 있지만 은행권 대출은 더 어려워졌다. 기업들은 재무상태가 열악해지고 은행들은 자산을 보수적으로 운용하면서 대출 문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국민, 신한, 하나, 우리, 외환 등 5개 시중은행의 중소기업 원화 대출 잔액은 지난 8월 말 기준 223조4364억 원으로 7월 말보다 1조4935억 원 감소했다.
국내 대기업 납품 제조업체의 한 관계자는 “현재 사정이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수준이거나 그 당시보다도 나쁘다”라며 “돈이 제대로 돌지 않아 거래가 안 되면서 부도가 나는 곳도 있고 채무 상환을 하지 않고 도망가 버리는 경우도 있다”고 귀띔했다.
최근 부동산경기 침체 영향으로 건설업체의 타격이 가장 컸다. 공사 물량이 현저히 줄어든 데다 현금흐름도 악화되면서 부채가 걷잡을 수 없이 늘고 있다.
중견 건설업체 관계자는 “중견 건설업체 중에서는 1년 동안 한건도 수주하지 못하는 업체들도 속속 생겨나고 있다”며 “집행할 수 있는 비용이 점점 줄어 투자도 할 수 없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사업자 면허를 반납하는 곳도 있다”고 전했다.
10대 대기업이 상장사 현금 50% 차지
이에 반해 주요 대기업으로 구성된 10대 그룹의 현금 및 현금성자산 평균 감소율은 5.0%로 상장사 평균치보다 낮았다.
한화그룹은 현금성자산이 179.5%나 증가했다. 포스코그룹은 78.0%, 현대중공업그룹도 52.0%로 증가폭이 컸다. GS그룹은 12.4%, 롯데그룹은 9.7% 각각 늘었다.
반면 삼성그룹은 33.4%가 줄어 감소폭이 가장 컸다. 계열사 중 최대 비중을 차지하는 삼성전자가 32.1%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한진그룹(-15.2%)과 현대차그룹(-13.5%)도 감소율이 높은 편이었다.
보유 현금 및 현금성 자산 규모로는 현대차그룹이 7조 원으로 가장 많았고 이어 LG그룹이 3조9250억 원이었다. 특히 LG그룹의 경우 올 들어 채권시장에서만 3조2757억 원을 조달했다. 삼성그룹이 3조1630억 원, SK그룹 2조1290억 원, 현대중공업그룹 1조8740억 원 등으로 뒤를 따랐다.
10대 그룹 70개사의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은 모두 24조6550억 원으로 유가증권시장 632개사 전체 유동성의 50%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업종별로는 비금속광물(-40.7%), 종이목재(-33.1%), 운수창고(-26.4%), 서비스업(-21.4%)의 현금성 자산 감소율이 높았다.
시가총액 비중이 큰 대형주가 다수 포함된 업종 중에서는 전기·전자 업종의 현금성 자산 총액이 18.2% 감소해 운송장비(-2.4%)나 화학(-4.4%)보다 감소폭이 컸다. 이는 상반기 IT업황의 부진으로 수익이 기대에 못 미쳤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안성호 한화증권 기업분석팀장은 “올해 초만 해도 경기가 점차 회복될 것이라는 낙관론이 우세하자 기업들이 공격적인 투자를 계획하고 집행했다”며 “갑자기 유럽 재정위기가 불거지고 영업환경이 악화되면서 현금 보유량이 감소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이진우 기자] voreolee@dailypot.co.kr
이진우 기자 voreolee@dailypot.co.kr, kscho@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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