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대한-교보생명, 발빠른 자진신고로 중소생보사 울려

[김나영 기자] '죄수의 딜레마'는 두 공범자 중 먼저 자백하는 사람은 석방시키거나 형량을 감해주겠다는 조건을 제시한 후, 죄수들이 택할 수 있는 최적의 행동을 연구하는 게임이론의 대표적인 예다. '리니언시' 역시 담합한 기업들 중 먼저 자백하는 기업은 과징금을 면제 혹은 경감해 주겠다는 조건을 제시한다. 하지만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 두 공범자가 모두 자백하면 둘 다 처벌을 받게 되지만 '리니언시'의 경우 1, 2순위로 자백한 기업은 무조건 과징금을 면제 혹은 경감받는다는 점이 다르다. 생명보험업계에서 ‘리니언시’ 논란이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국내 및 외국계 생명보험사 16개 중 ‘배신자’가 있는데 그 ‘배신자’가 바로 담합을 주도한 ‘빅3’라는 것이다. 나머지 생명보험사들은 과징금 자체보다는 이러한 '리니언시'에 더욱 치를 떨고 있다. 그 속사정을 [일요서울]이 들어본다.
공정거래위원회(위원장 김동수, 이하 공정위)는 지난달 16개 생명보험사(이하 생보사)들의 보험료 담합에 관한 심사보고서를 각 생보사에 송부했고 각 사는 이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했다.
보고서에는 16개 생보사가 2001년 4월에서 2006년 12월까지 5년 9개월 간 보험료 공시이율 및 예정이율을 담합한 혐의를 비롯하여 과징금 부과 사유 및 산정 방법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공정위의 카르텔 조사국 관계자는 “보고서는 어디까지나 의견일 뿐 구체적인 과징금에 대해서는 아직 확정된 것이 없다”며 “결론이 언제 날 지 혹은 이후 일정이 어떻게 될 지에 대해서는 공개할 수 없다”며 말을 아꼈다.
합법적 배신을 조장하는 ‘리니언시’의 유혹
현재 생보업계는 다가올 과징금에 대한 걱정보다 가까운 ‘배신자’에 대한 분노로 가득하다. 삼성생명, 대한생명, 교보생명, 이른바 ‘빅3’가 먼저 담합을 주도한 후 자진신고해 과징금을 면제받을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삼성생명은 전년대비 당기순이익을 두 배로 확대하는 등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다. 대한생명과 교보생명은 만년 2위 다툼을 하는 실정이다. 이 세 대형생보사가 차지하는 시장점유율은 무려 65%에 이르며 그 영향력은 점유율 이상으로 평가된다.
이번 담합 역시 삼성생명, 대한생명, 교보생명이 서로 공시이율 및 예정이율을 합의하면 나머지 생보사들은 확인 후 뒤따르는 수준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대형생보사들은 담합을 주도한 후 공정위에서 조사에 들어가자 자진신고제도인 ‘리니언시’를 활용해 과징금을 비켜가고 나머지 중소생보사들은 고스란히 피해를 보는 셈이다.
논란에 대한 대형생보사들의 입장은 원론적인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삼성생명 관계자는 “아직 확정된 것이 아니라 잘 모르겠다”며 “외부뿐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이렇다 할 입장이 없다”고 말했다. 대한생명 관계자는 “현업 부서에서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분위기”라며 “공정위 발표가 나와야 알 것 같다”고 말했다. 교보생명 관계자는 “공식적인 대응을 할 만한 것이 없다”며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중소생보사들의 불만은 이미 팽배할 대로 팽배한 상태다. 한 중소생보사 관계자는 “빅3가 리니언시로 슬쩍 빠진 것은 이미 기정사실화된 것”이라며 “(공정위에서) 담합 조사를 하는 줄도 몰랐는데 가만히 있다가 완전히 당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중소생보사 관계자는 “한 마디로 억울하다"며 대형사가 담합이라고 규정지어버린 탓에 중소사들은 담합이 아니라고 반박할 수도 없는 상태”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또 다른 중소생보사 관계자는 “당시 지적된 기간(2001~2006년)에는 시장지배구조가 지금보다도 편중돼 있었다”며 “대형사들이 더욱 책임을 느끼지는 못할망정 자진신고제를 악용해 중소형사를 죽이는 것은 분명 도덕적 해이”라고 비판의 날을 세웠다.
향후 공정위의 최종 발표에서 담합이 사실로 드러날 뿐 아니라 '리니언시'도 행해졌다면 어떻게 될까. 대형생보사들은 담합을 주도했음에도 자진신고를 마쳐 ‘뻔뻔하다’는 비판만 꿋꿋이 감내하면 막대한 과징금을 절약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소생보사들은 공정위에 담합이 아니라는 해명도 하지 못한 채 ‘억울함’을 뒤로 하고 매출액의 0.5~5%에 이르는 과징금을 낼 것이다.
한편 생명보험협회(협회장 이우철, 이하 생보협회) 관계자는 “이번 논란은 관여할 수 없는 부분이 크다”며 “협회에서 공식적으로 관여하는 순간 문제가 더 심각해질 수 있다”는 입장을 전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중소생보사 관계자들은 “생보협회는 생보사들의 분담금으로 운영되는 조직인 만큼 아무래도 규모가 커서 분담금을 많이 내는 빅3를 감쌀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며 “생보사들의 입장을 대변해야 할 생보협회가 업계 문제를 곤란하다는 핑계로 회피하려고 한다”며 비난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업계 관계자는 “이번 논란처럼 리니언시가 악용되는 소지가 종종 있다”며 “반복되는 만큼 보완책이 시급히 마련되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nykim@dailypot.co.kr
#‘리니언시’란?
담합자진신고자 감면제인 ‘리니언시(Leniency)’는 담합 사실을 첫 번째로 자진신고한 기업에게는 과징금 100%, 두 번째로 자진신고한 기업에게는 과징금 50%를 감면해 주는 제도다.
리니언시는 담합행위의 자진신고를 유도하기 위한 제도인 만큼 양면성이 있다. 먼저 리니언시는 담합 수사 시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과 노력으로 보다 확실한 대상과 증거를 확보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자진신고를 종용해 담합에 참여한 기업들끼리의 불신을 조장하고 향후 담합도 방지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리니언시는 특정 기업이 담합으로 이득은 모두 취한 후 자진신고를 반복해 처벌을 면제받는 악용을 초래할 수 있다. 또한 과징금은 매출액을 기준으로 산정되기 때문에 과징금 면제 규모에 따라 형평성의 논란도 예상된다. 뿐만 아니라 담합을 주도했던 기업이 자진신고를 하면 이를 두고 모럴 헤저드(Moral Hazard, 도덕적 해이) 논란도 끊이지 않는다.
현재 리니언시와 관련, 공정위의 담합 조사 때마다 대형사가 자진신고하는 것이 업계를 불문한 관행처럼 굳어져 주기적으로 논란을 빚어 왔다. 생보업계와 손보업계는 물론, 정유업계의 GS칼텍스, 식품업계의 (주)대상과 매일유업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발생한 바 있다.
김나영 기자 nykim@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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