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대표기업 창업주의 생애와 철학 그 숨은 이야기 2탄
대한민국 1%로 꼽히는 재벌들의 삶은 우리와 어떻게 다를까. 연예인과 재벌들의 일상은 쉽게 노출되지 않는다. 그래서 더 궁금하고 끌리는 법이다. 재벌들은 최근 인기리에 방영됐던 드라마 ‘시크릿 가든’이나, ‘로열패밀리’처럼 화려하게 살지도 모른다. 동시에 평범한 우리네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이에 [일요서울]에서 연속기획으로 재계 오너가의 삶을 재조명해봤다. 다르지만 같은 듯 한 그들의 일상을 살펴보자. <편집자 주>우리나라 근·현대사를 돌이켜보면 성공한 기업을 일구어낸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한 고난의 역정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창업주 대부분은 고난과 시련을 기업 경영의 당연한 과정이라고 여겼고, 기업 외적 요인에서 겪어야 했던 비난과 수모 역시 담담히 극복함으로써 한층 더 크게 도약했다.
최종건
SK 창업주의 키워드 재창업의 꿈 실현
SK는 할아버지-아버지-손자로 이어지는 3대 체제가 아니라 형-동생-조카로 이어지는 이른바 2.5세 체제다. 1998년 8월에 작고한 최종현 회장은 1976년 SK창업주이자 형인 고 최정건 회장의 뒤를 이었고, 그 뒤를 최태원 회장이 물려받았다.
담연 최종건 회장은 우리나라 재벌 기업 창업주 가운데 가장 짧은 생애를 살면서 가장 많은 업적을 이룩해 놓은 기업가로 꼽힌다. 18세 어린 나이에 일본인이 경영하는 선경직물 공장 견습기사로 입사한 청년 최종건은 6.25 동란 중에 폐허가 되다시피 한 공장을 정부로부터 인수해 불타버린 부품을 모아 직기 4대를 재조립하고 선경직물을 재건했다. 하지만 자기 사업을 해보겠다는 야망을 품고 1949년 선경직물 공장을 떠났지만 6.25동란 중 잿더미로 변한 선경직물 공장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 1953년 3월 청년 최종건은 불퇴전의 창업의지로 불타버린 100여 대 직기의 부속들을 수습해서 재조립하고 파괴된 공장 건물을 복구해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같은 해 8월 재창업의 꿈을 실현하게 됐다.
이후 청년 최종건은 섬유산업의 계열화를 위해 선경유화와 선경석유(정제)를 설립해 화학섬유의 원료산업인 석유화학 공업 진출을 도모했다. 그러나 석유파동이 밀려오던 1973년 11월 15일 평생 열망한 섬유산업 수직계열화의 꿈은 동생인 최종현 회장에게 넘기고, 아직은 한창 일해야 할 4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에 동생 최종현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경영 대권을 맡았다. 자연스레 사회 각계의 이목과 관심은 선경그룹 총수 자리를 승계한 최종현에게 집중됐다. 평소 형의 그늘 아래서 밖으로 드러나기를 꺼렸던 최종현의 경영능력을 외부에서는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 심지어 회사 안에서도 새 총수를 의심하는 눈초리가 매서웠다. 이에 최종현은 10여 년을 공들여 온 산유국과의 인맥을 통한 정면 돌파로 유공 인수에 성공했고, 선경에 입지를 구축해 나아갔다. 유공을 인수하면서 자신감을 얻은 최종현은 종합 에너지, 종합 화학기업으로의 과감한 기업변신을 단행하면서 ‘석유에서 섬유, 최근에는 통신까지’ 행보를 꾀하며 그 바통을 조카인 최태원 회장에게 넘겼다.
신격호
롯데 창업주의 키워드 강한 집념 열정 의지
신격호 롯데 회장은 어린 시절 홀로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문화와 고등교육을 체험하였다. 2차 대전 후 일본의 산업화와 세계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일본에서 기업을 창업하여 부를 일궜다. 197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한국에 투자를 시작하였을 때에 그는 이미 일본에서 온몸으로 부딪혀 얻은 체험을 통해 한국의 사회 경제가 향후 20년 이내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를 예상하고 있었다. 청년 신격호의 예측은 그대로 들어맞았고 강한 집념, 열정, 의지로 롯데를 일구어냈다.
하지만 청년 신격호의 첫 사업은 불운했다. 아르바이트로 인연을 맺은 일본 지인의 도움으로 군수용 커팅오일 공장을 준비했지만 미국기의 폭격을 받아 공장이 불타고 말았다. 이후 연변의 하치오지 지구에 공장 건물을 찾아내 다시 커팅오일 제조에 들어갔지만 이마저도 공장 운영 1년이 조금 지나 미국의 폭격으로 문을 닫았다.
1945년 8월로 접어들면서 전황은 더욱 급박해졌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사흘 뒤인 8월 9일 소련이 대일참전을 선언했다. 그 이튿날 미군은 나가사키에 또 하나의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그야말로 청년 신격호의 모든 사업은 전쟁의 재물(?)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청년 신격호는 이 위기를 기회로 삼았다. 일부 남은 잔재 커팅오일을 원료로 세탁비누, 세숫비누, 포마드, 크림 등 유지제품을 만들어 내는 공장을 만들었다. 화장품 제조라지만 지금까지 공장에서 취사용으로 사용되었던 커다란 솥에다 응고제와 약간의 방향을 혼합하여 제품을 생산하는 가내 수공업 규모였다. 그가 만든 화장품은 고급품은 아니었지만, 물자 부족 시대여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납품과 수금을 하기 위해 하루 200군데 상점을 돌아다녀야 할 정도였다. 이리하여 청년 신격호는 또 한 번 재기의 발판을 만들었다. 이어 그는 추잉껌의 원료로서 외국 제품에 사용되는 남미산 천연수지가 소량이지만 일본 내에 이미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완벽주의자인 그는 약제사 1인을 고용했고 연구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그 결과 사업은 날로 번창했고, 롯데는 추잉껌 사업을 발판 삼아 제조, 유통, 외식 등 각 분야로 발을 넓혔다. 현재는 한국과 일본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김종희
한화 창업주의 키워드 ‘뚝심경영’
고 김종희 한화그룹 창업주의 생전 별명은 ‘다이너마이트 김’이다. 다이너마이트 등의 화학 사업에 주력하면서 맺은 주한미군과 미 대사관 관계자들 간의 돈독한 인맥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이너마이트처럼 폭발적인 에너지를 발휘하며 기업을 성장시킨다는 의미에서 이런 별칭이 따라붙었다. 그는 민족 수난기에 태어나 성장하고 교육 받았다. ‘한평생 사업을 통한 보국’의 일념 아래 기업경영 자체가 곧 국가와 사회에 ‘봉사’하는 것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삶을 살았다. 그는 해방 이후 나라의 틀이 갖춰질 무렵 ‘화약’을 통해 기업인으로서의 인생을 점화했다. 6.25등 혼란기를 틈타 소비재 산업에 주력해 기업의 규모를 키울 수도 있었지만 그는 당시 소비재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조국 근대화를 위해선 기간산업에 참여하는 것이 최선이라 믿었다. 이에 그는 화학 국산화를 위해 강력한 다이너마이트를 제조하는 데 인력과 설비를 집중하는 총력전을 펼쳤다. 급기야 1957년 5월 인천화약공장 초화공실을 높게 에워싼 토제 위로 대형 직각 삼각형의 적색 깃발이 올라 다이너마이트 시험 생산이 시작됐음을 알렸다. 초화공실의 적색 깃발은 초화 작업 중임을 알리는 신호였다.
하지만 성장을 거듭하던 1977년 11월 11일, 이리역에서 대규모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매스컴은 “한화는 이제 끝났다”는 보도를 연신 터트렸다. 사고 자체가 워낙 커 그간 공들여 쌓은 이미지가 한순간 실추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김 창업주 역시 폭발사고로 인명이 희생되고 그들의 삶의 터전을 무너뜨렸다는 데 심한 자책감을 느꼈다. 사고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지고 다시 맨손으로 돌아가 정정당당하게 출발해 보겠다는 그의 의지는 다시금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빈털터리가 될지언정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하겠다는 김 창업주의 철학이 있었기에 이리역 폭발 사고의 후유증을 딛고 전열을 재정비한 한화는 1970년대 말 국내 10대 그룹, 세계 500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최수부
광동제약 창업주의 키워드 한방 외길 인생
46년 한방 외길을 걸은 최수부 광동제약 회장은 “요즘 신입사원은 집에서 왕자와 공주로 커 사회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고 안타까워했다.
최 회장은 열두 살 때 전 재산을 날리고 실의에 빠진 아버지를 대신해 소년 가장이 됐다. 아홉 식구의 생계를 떠맡아야 했던 그는 도둑질 말고는 안 해본 일이 없다고 한다.
그러느라 초등학교를 4년 만에 중퇴했다. 사업을 시작한 후엔 모함을 당해 99일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한 적도 있다. IMF체제 당시 부도 위기도 겪었다.
하지만 그는 맨주먹으로 시작해 3100억 원 매출(2009년 기준)의 제약회사를 일궈냈다. 2004년 펴낸 자서전 ‘뚝심경영’에서 그는 지금의 전·방위적 경제난국을 예견이라도 한 듯 “대한민국 사장 여러분, 포기하지 맙시다”라고 썼다. 직원들을 생각해서라도 당당히 재기하라고 ‘선동’했다.
특유의 뚝심은 유년시절부터 엿보였다. 최 회장은 일제 강점기 일본에서 태어났다. 소학교에 입학한 청년 최수부는 ‘조센징’이라는 이유로 일본인 동료들에게서 노골적인 멸시와 폭행을 당했다. 괴롭힘을 견디다 못한 그는 어느 날 아버지 공장에 있던 검도 호신 도구를 가방에 챙겨 넣었다. 학교에서 여느 날처럼 일본 학생들이 시비를 걸자 그는 이 도구를 꺼내 무차별적으로 휘둘렀다. 그 길로 미련 없이 교문을 나섰고 그날 오후 퇴학 처리됐다.
그는 ‘가방끈’이 짧지만 성실함만은 최고였다. ‘최씨 고집’이라는 브랜드는 끈기와 배짱에서 나왔다. 거기에 착실한 고객관리를 더했다. 사람에 대한 신뢰가 제품에 대한 신뢰로 이어졌다. 청년 최수부는 경옥고 외판원 생활 3년 만에 광동제약 창업자금을 마련했다. 3년 연속 판매왕에 오른 그가 그 시절 받은 수당은 몇 십 명이나 되는 동료들의 수당 총액보다도 많았다. 그렇게 벌면서도 그는 수제비로 점심을 때웠고 품고 다닌 접대용 고급 담배엔 손을 대지 않았다. 여름엔 면도칼로 신발에 환기구멍을 내 신고 다녔다. 약장수라고 푸대접하는 곳은 더 자주 들렸다. 아침에 출근할 때 아예 오장육부를 빼놓고 나섰다. 그 결과 광동제약은 현재 제약업계 빅5 안에 드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 일등공신에는 ‘비타 500’이 있었다. 이 역시 최 창업주가 정제비타민이 연간 50억 원어치씩 팔리는 것을 보고 착안했다. 이미 경옥고와 우황청심환을 드링크 또는 현탄액으로 만든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의 마지막 꿈은 2세가 회사를 물려받아 국민 제약회사로 키우는 것이다.
[산업경제부]
산업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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