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수號, 한은법 개정 '꿈'은 이뤄질까
김중수號, 한은법 개정 '꿈'은 이뤄질까
  • 박영환 기자
  • 입력 2011-06-13 10:26
  • 승인 2011.06.13 10: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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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은행은 이미 '대형 출판사'로 전락했습니다", "대형증권사 중에도 자료 요청에 콧방귀를 뀌는 곳이 더러 있어요". 한국은행 직원들은 요즘 자신들의 처량한 신세를 '출판사'에 빗대 토로하곤 한다. '금융시장 동향', '소비자·생산자 물가', '월별 외환 보유고'. '분기별 GDP 성장률'…

한국은행이 매월 쏟아내는 자료들은 방대하다. 웬만한 대형 출판사들이 울고 갈 지경이다. ''최종 대부자', '지급결제제도 운영자'… 한은을 따라 다니는 화려한 수사에 어울리는 '중량감'은 매주 봇물을 이루는 발표 내용에도 묻어난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저축은행사태는 한은 직원들의 박탈감을 엿보는 '창(窓)'이다.

양질의 정보는 통화신용정책 수행의 기본이다. 한은의 고민은 이러한 정보에 접근하기가 극히 힘들다는 점이다. 한은이 최근 발표한 '금융기관 유동성' 자료는 이러한 고충을 엿보는 '단서'이다. 이 자료에는 저축은행의 가계·기업 대출 항목이 빠져있다. 민감한 시기임을 들어 이번에는 제외해 달라는 협조 요청을 수용했다는 후문이다.

금융기관에 부실이 생겼을 때 최종 대부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한은은 법적으로 제2 금융권에 자료를 요청할 근거 조항이 없다. 그렇다고 은행 쪽 자료를 받기가 수월한 것도 아니다. 지난 1998년 개정된 '한국은행법'은 금융 기관에 대한 자료제출 요구권을 인정하고는 있지만, 그 범위를 '최소한'으로 한정하고 있다.

반면, 금융감독원의 자료제출 요구권에는 아무런 단서가 없다. 금융감독당국이 민간 은행들의 직원 평가기준까지 일일이 간섭하는 데 비해, 한은은 이들의 경영상황을 판단할 정보가 아쉽다. 비유컨데, 워크아웃이나 법정관리 절차를 밟는 기업을 상대로 실사를 하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지만, 한은의 경우 최소한의 조사권을 행사하기도 힘든 게 현실이다.

한은이 한은법 개정안을 통해 긴급 여신을 수혈 받는 금융기관에 한해 직접 조사권을 되살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도 이 때문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현실은 결코 녹록치 않다. 금융감독위원회는 정무위가 제출한 금융위원회의 설치 등에 관한 개정법률안을 통해 한은의 이러한 독자 행보에 강력히 맞불을 놓고 있다.


◇저축은행 사태, 통합감독시스템의 '한계'

한국은행과 금융감독위원회의 위상이 엇갈린 것은 1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시아 외환위기가 발발한 다음해인 1998년 4월, 은행·증권·보험에 대한 통합감독체계가 도입되면서, 한은이 보유하고 있던 은행 조사권이 금융감독당국으로 이전됐다. 반세기 가까이 은행 감독을 담당해오던 한은은 감독 당국의 지위를 이때 상실했다.

명분은 강력했다. 외환위기의 발발이 전기였다. 금융 감독의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금융개혁위원회는 타협책도 제시했다. 은행·증권·보험사에 대한 포괄적 감독권한을 금융위에 주되, 한은 등 감독관련 기관들의 협력과 견제와 균형를 중시한다는 내용이었다. 금융개혁위원회가 금융감독 체계 변경의 밑그림으로 삼았던 나라가 금융선진국인 영국이었다.

문제는 감독관련 기관들의 협력과 견제와 균형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통합금융감독당국이 출범한 이후에도 대형 금융사고가 끊이질 않고 있는 배경으로 이러한 시너지의 부재를 꼽는 목소리가 높다. 지난 2000년 가을, 동방·대신·열린상호신용금고 불법대출사고가 잇달아 터져 나온 것이 반면교사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지난 2008년에도 키코(KIKO. Knockin-Knockout) 사태가 터졌다. 이 여파로 우량 중소기업들이 줄도산하자, 주기적으로 위기를 실어나르는 은행 부문에 대한 감독당국의 역량 부재를 질타하는 비판도 높았다. 감독당국 인사들이 줄줄이 연루된 '저축은행 사태'는 통합감독 시스템의 허실을 드러낸 백미(白眉)였다.

전문가들의 진단은 이렇다. 한은을 비롯한 기관과 협력을 규정하면서도 '제한적 감독권'만을 인정한 이중적 조항이 감독당국의 일방적인 독주와, 모럴해저드의 씨앗을 뿌렸다는 것. 외풍에 휘둘리기 쉬운 관료주도의 통합감독 시스템을 탓하는 목소리도 높다. 금융감독당국이 저축은행 사태의 주연이라는 정황은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금융 불안의 '뇌관'을 제거한다는 명목아래 시장원리에 반하는 선택을 시장 참가자들에게 강요하는 등 대증요법을 쓰면서 또 다른 위기의 불씨를 남기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비판이다. 지난 2008년 9월,서브프라임모기지발 위기도 따지고 보면 저소득층에게 이른바 내집 마련의 기회를 주겠다는 미국 민주당 행정부의 정치적 동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한은법 개정 이상은 멀고, 현실은 완강

'한국은행을 떠나며.' 한국은행 정문에서 본관 방향으로 10여미터 떨어진 지점 오른 편에는 허름한 비석이 하나 있다. 지난 1998년 4월, 한국은행법 개정으로 은행감독원 기능이 한은에서 분리되며 작별을 고해야 했던 이들이 남긴 '비망록'이다. 이 비석에 새겨진 글씨의 색깔은 바랬지만, 한은 직원들은 이를 가슴에 새겼다.

'한국은행법의 개정'이라는 이상은 아름답지만 멀고, 현실은 완강하다. 지난 1990년대 중반 이후 지루한 공방을 거친 끝에 외환위기의 외풍을 등에 업고 천신만고로 얻은 '전리품'을 순순히 되돌려줄리 없다는 점에서, 금융조사권을 둘러싼 한은과 금감위의 한판 대결은 전면전도 불사하는 형태로 치닫을 전망이다.

참여정부에서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을 지낸 김태동 성균관대 교수는 "금융 조사 기능을 외압에 휘둘릴 수 있는 금융감독당국에 맡겨 두기보다, 한국은행처럼 상대적으로 독립성이 강한 기관에 부여하는 것도 저축은행사태를 비롯한 금융위기의 주기적인 재발을 막는 방편일 수 있다"며 한은에 대한 조사권 부여에 찬성했다.

하지만 정부 여당이 기준 금리를 결정하는 한국 은행의 '독자 행보'를 결코 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번 대결이 결코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지난 1979년 고금리 정책으로 지미 카터의 재선을 가로막은 폴 볼커와 같은 역할을 한은에 결코 바라지 않는 것은 정부 여당의 인지상정이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차기 정부에서 어떤 식으로든 금융감독당국의 감독권을 수술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박영환 기자 yunghp@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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