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총수들과 스포츠의 각별한 인연

재계 스포츠 리더십이 다시 주목 받고 있다. 제7회 아스타나-알마티 동계아시안게임에서 우리나라 대표팀 선수들이 금메달을 딴 배경에는 각 종목 단체장을 맡은 기업 총수들의 아낌없는 지원과 후원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에 이들 기업인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고 있다. 현재 대한체육회에 가맹돼 있는 58개 경기단체 중 전·현직 기업인이 회장을 맡고 있는 곳은 24곳에 달한다. 이처럼 각종 체육단체장으로 활약 중인 그룹 총수와 기업 대표가 한둘이 아니다. 총수, 협회장 등의 자격으로 스포츠 분야 곳곳에서 활약하고 있는 재계 인사들을 살펴봤다.
지난 아스타나-알마티 동계아시안게임에서 13개의 금메달을 따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이 기대 되는 가운데 많은 재계 인사들이 회사 경영은 물론, 스포츠 경영에서도 남다른 열정을 발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에는 기업 오너들 뿐만 아니라 전문경영인들도 스포츠경영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지난 10일 제일모직 김재열 부사장이 대한빙상경기연맹(빙상연맹)에 새 회장으로 내정됐다. 뿐만 아니라 정의선 현대·기아차 부회장은 아버지 정몽구 현대차 회장 뒤를 이어 대한양궁협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스포츠는 우리가 책임진다…
제일모직, 한진, 한솔, 현대
이번에 퇴임하는 빙상연맹 박성인(73) 회장은 1997년 6월부터 14년간 연맹의 수장이 되어 한국빙상의 전성기를 이룩했다. 그 뒤를 앞으로 제일모직 김재열 부사장이 이을 전망이다. 김 부사장은 작고한 김병관 동아일보 회장의 차남으로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의 차녀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의 남편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김 부사장은 2002년 제일기획에 상무로 입사해 지난해 12월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또 빙상연맹 국제부회장을 맡아 국제 스포츠외교를 담당해왔다.
탁구협회장을 맡은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도 재계에선 유명한 스포츠 후원자다.
특히 조 회장은 대한탁구협회가 회장파와 비회장파로 나뉘어 오래도록 갈등을 거듭했을 때 타고난 리더십으로 대한탁구협회를 하나로 결속시킨 일화는 유명하다.
조 회장 전임 회장이었던 천영석 전 회장은 ‘사라예보 신화’를 창조한 주역으로 경기인 출신으론 처음으로 2004년 탁구협회 회장에 올랐다. 그러나 천 전 회장 취임 이후 탁구협회의 든든한 자금줄이었던 KRA(전 한국마사회)가 지원금을 줄이고 매년 8억 원 이상 출연하겠다던 천 전 회장의 약속마저 지켜지지 않으면서 회장 퇴진파가 형성됐다.
이런 와중에 천 전 회장이 사임하고 조 회장이 신임회장 자리에 올랐다. 재계 총수가 탁구협회 회장이 된 것은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79~95년) 이후 처음이다.
당시 한국 탁구는 최 전 회장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86년 서울 아시안게임 금메달 3개, 88년 서울올림픽 금메달 2개, 93년 세계선수권대회 여자 단식 우승 등 황금기를 구가했다. 오랜만에 재계 총수 회장을 맞이한 탁구협회가 큰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은 당연지사다.
조 회장 역시 회장 취임식 이후 베이징올림픽 탁구선수단에 성금 1억 원을 전달하는 등 의욕을 보였다. 조 회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 선임된 이후 평창 동계 올림픽 유치를 위해 전방위적인 스포츠 외교를 펼치고 있다.
오랫동안 대한양궁협회 회장 자리를 맡고 있는 현대가의 양궁 사랑도 빼놓을 수 없다. 정몽구 회장·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은 부자가 대를 이어 양궁 선수들과 인연을 맺고 있다.
특히 정몽구 회장은 1984년부터 1997년까지의 기간 동안 네 차례나 협회장을 연임하는 등 한국 양궁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울러 정 부회장은 2005년부터 지금까지 장기간 협회장을 맡아오며 한국 양궁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돋움 할 수 있게 전폭적인 지원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이들의 양궁사랑과 관련된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현재 양궁협회 명예회장으로 물러난 정 회장이 양궁협회 회장에 취임한 때는 1985년으로 기업인이 사회공헌 차원에서 비인기 종목 협회장을 떠맡는 경우가 허다했다. 의무적으로 맡은 자리이니만큼 명목만 유지할 수도 있겠지만 정 회장은 달랐다.
86년 서울 아시안게임을 몇 달 앞둔 어느 날, 미국 출장을 다녀온 정 회장은 협회로 무거운 화물을 보냈다. 정 회장이 심박수 측정기, 시력 테스트기 등 선수들 기량을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첨단장비들을 직접 산 것이다. “과학적 훈련을 위해서는 장비를 먼저 과학화해야 한다”며 정 회장이 출장 중 따로 시간을 내 직접 산 것이다. 동시에 경희대 의대 서병희 박사와 스포츠과학연구소 김병현 연구원을 초빙해 선수들 컨디션과 심리 상태를 과학적으로 관리하게 했다.
이처럼 양궁 발전에 크게 관심을 기울인 정 회장이었지만 회장을 맡았던 지난 20년간 정 회장은 단 한 번도 회장 예우 차원에서 부여되는 대표선수 추천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오로지 기록과 실력으로만 승부하라’는 정 회장 주문은 양궁업계 종사자라면 알아야만 할 일화로 전해지고 있다.
현대가의 또 다른 계열사인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은 축구에 대한 애정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한국프로축구연맹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는 지난달 25일 정 회장을 새 프로연맹 회장으로 추대하기로 했다. K-리그에 정통한 관계자는 “정 회장이 프로축구연맹 회장직을 수락했다”며 “조만간 취임식을 여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정 회장은 부산 아이파크 구단주로 울산 현대와 전북 현대의 창단 작업에도 관여하는 등 프로축구 현장에 대한 경험이 풍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조중연 대한축구협회 회장은 “프로축구 TV 중계권 문제를 A매치와 연동해 계약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며 “정 회장은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명예회장의 직계로 범 현대가의 정 회장이 맡을 프로연맹과 축구협회의 협력 관계도 탄탄해질 계기가 마련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한편 비대위 대변인인 안병모 부산 아이파크 단장은 “대체로 의견을 모아 하나의 카드를 정했다. 하지만 아직 확정된 건 없다”며 “조만간 있을 발표를 기다려달라”고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비인기 종목도 후원…
SK, 한화, 한솔, 포스코, 삼성
잘 알려진 인기종목이 아닌 비인기 종목에 개인적인 의지로 관심과 지원을 하는 재계 인사들도 많다.
최태원 SK그룹 회장(대한핸드볼협회),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국제아마추어복식연맹), 조동길 한솔그룹 회장(대한테니스협회), 구자열 LS전선 회장(대한사이클연맹) 등이 대표적이다.
최 회장의 핸드볼 사랑은 이미 재계에 널리 알려졌다. 최 회장은 2008년부터 대한핸드볼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하지만 이런 최 회장도 한때 대한태권도협회 고문을 맡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최 회장은 결국 대한핸드볼협회장에 취임해 전국대회 참가팀 참가비 지원, 창단 지원금 지급, 어린이핸드볼교실 육성 등 파격적인 지원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지난해 5월에는 핸드볼 전용 경기장 기공식을 가졌다. 최 회장의 이런 행보에 SK그룹 최고경영진도 앞 다퉈 후원에 나서고 있다.
대한펜싱협회는 그룹의 어른인 손길승 SK텔레콤 명예회장이 주도하고 있다. SK의 관심과 격려 덕분에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여자핸드볼은 동메달을, 펜싱에서는 남현희·구본길 선수가 동반 금메달을 땄다.
한화그룹 김 회장도 스포츠에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는 대표적인 기업인으로 꼽힌다. 김 회장은 2009년 국제아마추어복싱연맹(AIBA) 산하 재단인 국제복싱발전재단(FBB)의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학창시절 아마복싱 선수로 활약한 적이 있는 김 회장은 이미 1982년 대한아마복싱연맹 회장에 취임 후 15년 동안 재임하며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복싱 외에도 김 회장은 계열사인 한화갤러리아를 통해 대한사격연맹에도 간접적인 지원사격을 하고 있다.
현장경영으로 유명한 정동화 포스코건설 사장도 바쁜 해외 일정 와중에 올 1월부터는 대한체조협회장을 맡아 일하고 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경우 탁구, 레슬링, 승마 등 이른바 ‘비인기 종목’을 꾸준히 지원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우리나라가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선전한 것은 삼성이 지난 10여 년 간 빙상 종목에만 100억여 원을 지원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평이다.
이밖에 박순호 세정 회장은 대한요트협회 회장, 홍문표 한국농어촌공사 사장은 대한하키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서울올림픽 유치 위해 시작돼
이처럼 재계 총수들과 스포츠는 각별한 인연이 있다. 시작은 정주영 현대 창업주가 서울올림픽을 유치한 198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체육 중흥의 필요성을 절감한 정부와 재계는 각 그룹별로 경기단체를 후원하는 방식을 택했다.
특히 이명박 대통령도 현대건설 사장 재직 당시 대한수영연맹 회장(1981~1992)을 10년 이상 지낸 경력이 있다. 이 대통령이 지난 베이징올림픽 때 수영장을 직접 찾는 등 애착을 보인 것도 이런 인연이 배경에 있다.
<이지영 기자> sky1377@dailypot.co.kr
이지영 기자 sky1377@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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