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현대·기아차그룹 정몽구 회장, LG그룹 구본무 회장 등 이른바 ‘오너 빅3’를 포함해 강신호 전국경제인연합회장 등 경제 5단체장이 모두 포함돼 있다.동행 기업인 면면은 지난해 5월 노 대통령의 미국 방문 때와 엇비슷하다. 하지만 그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또 다른 복심이 깔려있다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다.지난해 방미 때는 촛불시위 등으로 반미감정이 고조돼 한미관계가 악화 일로로 치닫고 있는 상황이어서 대미 수출의존도가 높은 재계가 바짝 긴장한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노 대통령의 미국 방문이 추진됐고, 재계는 경제단체장과 재벌총수들이 직접 나서 방미 동행을 신청했었다.하지만 이번 러시아 동행은 상황이 다르다.
경제적 가치를 최우선으로 따지는 재계 입장에서 볼 때 미국과 러시아는 비교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러시아의 풍부한 자원과 성장가능성, 잠재적 경제력 등을 감안하면 투자가치는 충분하다는 게 재계의 일반적인 시각이다.정부도 러시아의 이러한 잠재적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경제협력 강화 방안 등을 적극 모색할 것으로 알려졌다. 재벌총수 등 재계 인사들을 대거 동행케 한 배경에도 대기업의 투자의욕을 고취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그렇다면 재벌총수들은 왜 직접적인 성과물을 기대하기 힘든 러시아행을 결심했을까. 물론 대통령의 해외 순방 때 경제단체장 등 재계 인사들의 동행은 관행화돼 있는 게 사실이다. 이는 비단 우리나라 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오너 빅3’를 포함한 재벌총수 등 50여명에 달하는 재계 인사들이 대거 러시아행에 동참한 배경에 의문이 끊이질 않고 있다. 여기에 참여정부 출범 후 각종 개혁정책과 관련해 견해를 달리하고 있는 정부와 재계의 불편한 관계는 이러한 의문을 부추기고 있다. 특히 발걸음이 무거운 재벌총수들의 동행 배경에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국감 피하기’라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을 정도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정기국회와 국정감사 시즌이 되면 재계의 촉각은 정치권으로 향한다. 재계 현안과 관련한 민감한 사안들이 국감시즌에 집중적으로 다뤄지기 때문이다. 대기업 정보팀은 이러한 재계 현안을 다루는 정무위 재경위 등 국회 상임위 동향을 파악하느라 정기국회가 시작되는 9월초부터 정보 취합에 열을 올린다. 특히 재벌 총수들의 국감 증인채택 문제는 대기업 정보팀이 최우선적으로 파악해야 하는 지상 과제다.
또 해당 상임위에서 자신들의 총수를 비롯한 오너 일가가 증인으로 채택될 경우에는 이를 무마하기 위한 전방위 로비작전에 돌입한다.지난 2000년 10월 당시 국회 정무위가 실시한 대북송금 등 현대그룹 비자금에 대한 국감은 재계의 대국회 로비실태를 잘 증명해 주고 있다. 현대그룹에 대한 국감 실시가 확정되자 당시 현대그룹은 전사적으로 대국회 로비전을 펼쳤다. 해당 상임위인 정무위 소속 여야 의원들에 대한 골프 접대 및 금품 살포를 조직적으로 전개했던 것. 박지원 전청와대비서실장을 비롯해 권노갑 전민주당고문 등 여야 정치인 8명이 ‘현대비자금’에 연루된 혐의로 대부분 실형을 선고 받았다는 사실은 현대그룹의 대규모 로비전을 잘 입증해 주고 있다. 특히 현대는 고 정몽헌 전회장을 국감증인에서 배제하기 위해 정무위 소속 의원들에게 거액의 금품을 살포했던 것으로 검찰 수사 결과 드러난 바 있다.
지난해 국감 때도 재계의 대국회 로비전은 뜨겁게 달아 올랐다. 당시 국회 정무위는 재계 총수 등을 비롯해 1차 국감증인으로 156명(참고인 16명포함)을 확정했다. 하지만 여야 간사단 협의 과정에서 1차 명단에 올랐던 굿모닝시티 사건, 대북송금 사건, 노 대통령 친인척 비리 사건 등과 관련된 증인들이 전부 배제되면서 증인은 대폭 축소됐다.재계에선 현재현 동양그룹회장, 손길승 SK그룹 회장,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 등이 당시 국감 증인으로 최종 채택됐고, 금융계선 김정태 국민은행장(로또복권 관련)을 비롯해 카드부실 문제와 관련해 카드사 사장단이 참고인으로 채택된 게 전부였다.매년 국감시즌이 되면 정무위 등 재벌관련 국회 상임위 소속 의원들이 재벌총수를 반드시 국감증인으로 세우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있지만 실제로 이러한 의지가 실현된 경우는 흔치 않았다.
국회가 ‘재계 로비에 약하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는 배경에는 재벌총수들을 국감장으로 불러들이는데 실패한 과거 사례가 자리잡고 있다.하지만 17대 국회는 이러한 오명을 떨쳐 버리겠다는 강한 의지를 다지고 있다. 특히 ‘반 재벌’ 성향이 강한 민노당과 여야를 망라한 개혁·소장파 의원들은 더 이상 재계의 대국회 로비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며 단단히 벼르고 있는 분위기다.국감 시즌을 앞두고 재벌총수들이 러시아행 티켓을 예약한 것과 빠듯한 해외 일정 스케줄을 잡아둔 배경에는 ‘국감 피하기’ 노림수가 내포돼 있을 것이란 시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anderia10@ilyoseoul.co.kr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