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사찰 등 北 정상적인 협상 대상자 아니었다
핵사찰 등 北 정상적인 협상 대상자 아니었다
  • 정태익
  • 입력 2018-12-29 01:04
  • 승인 2018.12.29 01:22
  • 호수 1287
  • 1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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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 오럴 히스토리] - 정태익 편
IAEA 총회 모습 [뉴시스]
IAEA 총회 모습 [뉴시스]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6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정태익 전 주러대사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미국, 1992년 전 세계에서 전술핵무기 철수
북한, ‘상호주의 원칙’ 미국 주도 편파적 원칙이라며 거부

- 대사는 1992년부터 약 1년 동안, 외교부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서 중 하나인 미주국장으로 재임했다. 미주국장으로 재직할 당시 외교안보적 이슈는 어떤 것들이 있었고, 또 대사는 어떤 일에 관여 했나?

▲ 한·미 동맹관계는 우리나라의 생존과 번영의 핵심적 외교관계다.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바탕으로 국가의 생존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번영을 도모해 온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청와대에서 2년간 대통령 비서관으로 근무한 후 미주국장으로 임명되어 이상옥 외무장관, 유종하 외무차관과 일했다. 전임자인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은 주미공사로 임명돼 워싱턴으로 떠났다.

1992년에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이 발효되어 비핵화를 위한 상호 사찰 규정을 마련하기 위해 북한과 협상하는 일이 미주국의 주 업무가 됐다.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에 따라 핵 사찰 문제를 다루는 업무는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1992년 전 세계에서 전술 핵무기를 철수시켰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미국 본토에서도 목표물을 파괴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됐을 뿐만 아니라, 전술 핵무기가 외국에 전진 배치됐을 때 테러리스트들이 탈취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또한 무엇보다도 미·소 간 데탕트정책으로 미국이 소련과 마찰을 피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전술 핵무기를 철수하겠다는 방침을 세운 것인데, 우리 외교 당국이 이를 북한의 비핵화에 활용했다. 

북한은 소련이 해체되고 동구권이 무너지는 위기 상황에서 남북 대화의 물꼬를 트고 비핵화를 선언하는 것이 위기 타개책이 되겠다는 전략적 판단 하에 남북기본합의와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에 합의했다.

- 그 당시 핵통제공동위원회가 구성됐다. 어떤 사람들이 참여했나?

▲ 남북기본합의서 협정 내용을 구현하기 위해서 경제공동위원회, 군사위원회 등 각종 위원회가 구성됐다. 그중 하나가 핵통제공동위원회다. 핵통제공동위원회의 우리 측 초대 위원장은 공로명 당시 외교안보연구원장이고, 북한 측 위원장은 최우진 대사였다. 다른 공동위원회는 한두 번씩 열렸지만 핵통제공동위원회는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이 채택되면서 비핵화를 위한 상호 사찰 규정을 만들기 위해서 판문점에서 협상이 개시됐다. 당시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하고 핵안전조치협정에도 합의를 해서 IAEA의 사찰을 받고 있었다. IAEA의 사찰과 더불어 남북한 간에 별도로 상호 사찰을 받게 하는 이중 장치가 설치되면서 한반도 비핵화가 공고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북한이 한국군 군사기지는 물론 주한미군기지도 사찰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북한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하고 우리 측은 북한의 군사기지와 비공개 핵시설을 사찰할 수 있도록 요구했다. 하지만 북한 측은 이를 거절했다. 

이 밖에도 상호 사찰 횟수와 장소에 대한 협상 조건에서 북한 측은 상호주의 원칙을 거부했다. 북한 측은 정상적인 협상을 할 수 있는 대상자가 아니었다.

- 협상의 진행 결과는 어땠나?

▲ 북한과 판문점에서 거의 1년 동안 실무협상을 계속했다. 우리 측 수석대표는 공로명 당시 외교안보 연구원장이었고 미주국장인 나는 부대표 격으로 협상에 참여했다. 실무적인 협상은 나와 북한 측 대표인 김광진 대좌 간에 이루어졌다. 

우리 측은 초안을 만들어 먼저 제시함으로써 협상의 주도권을 잡는 전략으로 임했지만, 난관에 봉착했다. 어떠한 협상을 하든지 협상에 임할 때는 모든 나라가 준수해야 하는 국제사회에서 통용된 기본 원칙들이 있다. 

북한은 UN에서 채택한 국제 문제를 협상할 때 지켜야 할 17개에 달하는 원칙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상호주의 원칙이 가장 중요한 원칙인데, 북한은 국제 기본 원칙을 미국 제국주의가 주도해 만든 편파적 원칙이라는 이유로 준용을 거부했다.

북한은 한국군기지는 물론 미군기지와 우리나라 원전시설까지 사찰하겠다고 요구했다. 반면 북한은 영변에 있는 핵시설만 사찰하도록 허용하고, 북한군기지는 사찰 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 논거가 기장천외했다. 

과거 한국 언론에 따르면 남한에서 전술핵이 미군기지 내에 배치되어 운영됐고, 북한은 핵을 군부대에 배치한 적이 없기 때문에 애당초부터 사찰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찰 횟수도 우리가 1년에 12번씩 동수 사찰을 주장하면 북한 측에서는 6번만 받아야 되겠다고 주장했다. 자기들은 처음부터 핵무기가 없었기 때문에 설치한 적이 없으니 동수로 사찰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가장 큰 걸림돌은 팀 스피릿 문제였다. 군사훈련에 대해서 시비를 걸은 거다. 북한을 괴멸시키려고 하는 한·미 군사훈련 실시는 근본적으로 합의 정신을 깨는 것이므로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지막에는 팀 스피릿만 중단을 하면 북한 측이 대담한 양보 조치를 하겠다며 유인책을 썼다. 사정이 이러하니 판문점 회담은 실패했다.

미·소 간 SALT협상이 가능했던 것은 미·소가 상호 검증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는 상호 사찰을 예비하기 위해서 예산을 확보해 사찰팀을 양성할 계획을 짰다. 미국이 사찰팀 훈련 계획에 전적으로 협력을 했다. 미국은 사찰 경험이 많으니까 우리에게 사찰 규정안도 주고, 지금은 기대할 수도 없는 미국의 핵시설을 시찰하도록 배려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 전문가와 장비도 대여해 준다고 약속하며 우리가 완벽하게 준비하도록 도와줬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협상이 타결됐을 때 즉시 사찰단을 파견할 수 있도록 미국이 대비한 거다. 우리나라 과학자들은 당시에 미국 핵시설에 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을 거다. 미국이 우리 우방이지만, 핵 무장론이 대두된 이후부터 미국 핵시설 개방에 대해서는 비협조적이었으나, 북핵 시설 사찰 준비에 대해서는 예외적인 고려를 했다.  

정태익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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