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 | 고정현 기자] 지난 6.13 지방선거에서 자유한국당은 혹독한 국민적 심판을 받았다. 보수의 궤멸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집권여당이 잘해서라기보다는 보수 스스로가 자초한 궤멸이었다. 한국당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가지 못했고 시대정신에 맞게 변화하지 못했다. 그리고 2019년 기해년(己亥年)이 다가왔다. 그런데 정치권의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이 ‘데드크로스’를 맞이했다. 정부·여당에 호평 일색이던 여론도 돌아섰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진영 내부에선 ‘시대착오적 발상’으로 궤멸을 자초했던 한국당의 향수(?)까지 퍼지고 있다. ▲유시민 노무현 재단 이사장의 20대 무시 발언 ▲김정호 의원 공항 갑질 ▲이해찬 대표의 베트남 여성 발언 등이다. 한국당이 그랬듯, 정부·여당 역시 스스로 궤멸의 전주곡을 연주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 유시민 ‘20대 남성 무시 발언’, 김정호 ‘공항 갑질’, 이해찬 ‘베트남女 선호 발언’
- 리얼미터 12월 2주 차 여론조사, 20대 남성 29.4% ‘최저치’... ‘핵심 지지층’에서 ‘핵심 반대층’으로
유시민 노무현 재단 이사장이 한 강연에서 20대 청년을 거론하며 한 발언이 논란이 되고 있다. 유 이사장은 지난 21일 한 출판사가 마련한 강연에서 문재인 정부에 대한 20대 남성 지지율이 떨어지는 것에 대해 "같은 정부, 같은 사회에 사는데 20대 남녀 지지율이 두 배 이상 차이가 나는 것은 각기 다르게 느끼는 것이 있기 때문"이라며 "그게 뭔지는 몰라도 당연한 거고 정부가 감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유 이사장은 20대 남성이 여성들에게 역차별을 느끼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 세대는 '여자는 대학 안 가도 그만'이라는 식이었지만 지금 20대는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거의 여자였고 말 잘 듣는 여자애들은 선생님들이 이뻐해 주고 남자애들을 얼마나 차별했는지 느껴 온 세대"라며 "남자들이 군대도 가야 하고 여자애들보다 특별히 다른 것도 없는데 또래 집단에서 보면 여자애들이 훨씬 유리하다"고 말했다.
이어 "자기들은 축구도 봐야 하는데 여자들은 축구도 안 보고, 자기들은 롤(리그 오브 레전드)도 해야 하는데 여자들은 롤도 안 하고 공부하지, 모든 면에서 남자들이 불리하다"고 덧붙였다.
이는 남성들이 역차별과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려는 내용이었지만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상에서는 비난 여론이 쇄도했다. 특히 남성 중심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유 이사장이 20대 남성을 조롱거리로 삼았다”, “‘페미니즘 정부’를 지향하는 문재인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겠다” 등의 게시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20대, 특히 20대 남성 유권자들이 현 정부에 등을 돌리고 있는 상황이다.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가 YTN 의뢰로 지난 12월 10∼14일 전국 19세 이상 유권자 2천509명을 대상으로 조사(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2.0%포인트)해 17일 발표한 12월 2주 차 주간동향 여론조사 결과, ‘20대 남성’의 문재인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율은 29.4%로 나타났다.
가장 보수적이라고 평가되는 60대 이상 남성의 지지율(34.9%)보다 낮은 수치로 모든 연령대별 남녀 계층 중 최하위다. (자세한 조사개요와 결과는 리얼미터 홈페이지나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고하면 된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20대 지지율은 최고 수준이었다. 리얼미터의 지난해 12월 2주 차 주간동향 여론조사 당시 20대의 문 대통령 지지율은 80.6%에 달했다. 올해 12월 2주 차 조사에서 20대(남녀 포함) 지지율은 전체 평균(48.5%)보다 다소 높은 51.3%로 나타났다. 20대 여성 지지율은 63.5%로 모든 연령대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20대만 놓고 본다면 남녀가 극과 극의 결과를 보인 셈이다.
정치에서 핵심 지지층인 ‘집토끼’가 떠나는 것은 가장 위험한 상황이다. 정치적 위기에 처했을 때 버팀목이 돼줘야 할 계층이 오히려 안티로 돌아섰다는 의미다. 20대 남성은 이른바 ‘촛불 정국’에서 핵심 계층이었고 문 대통령을 만든 세대다. 핵심 지지층이 핵심 반대층으로 굳어지는 것 아닌지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유 이사장이 논란이 된 발언을 하기 하루 전인 20일엔 김정호 의원이 정당한 절차를 요구하는 공항직원을 향해 자신의 국회의원 지위를 내세웠다는 ‘갑질 의혹’ 파장이 붉어졌다.
김 의원은 이날 오후 9시 5분께 김포공항 국내선 출발장에서 경남 김해로 떠나기 위해 보안검색을 받던 중 자신의 휴대전화 케이스에 넣어진 신분증을 꺼내서 보여 달라는 공항 보안요원의 요구에 반발하며 폭언을 쏟아내는 등 갑질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김 의원은 투명한 여권 케이스에 들어있는 여권을 제시했고, 직원은 ‘신분증을 꺼내 보여달라’고 요구했으나 김 의원은 “지금껏 이 상태로 확인을 받았다”며 반발했다. 이 과정에서 김 의원은 자신이 국토위 의원임을 밝히며 관련 매뉴얼을 제시해보라며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논란이 커지자 김 의원이 두 차례에 걸쳐 해명했지만 이는 되레 사태를 키웠다. 특히 지난 22일 밝힌 첫 입장문에 담긴 “시민의 입장에서 상식적인 문제 제기와 원칙적인 항의한 것”이라는 문장은 김 씨에게 책임을 전가했다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또 CCTV 공개 요구가 커지자 ‘김포공항 검증’을 둔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해 빈축을 샀다. 지난 24일 김 의원은 부울경 동남권 관문공항 검증 중간보고에서 기자들과 만나 “(이번 일엔) 김해신공항 (검증)에 대한 기본적인 견제가 깔렸다. 저를 약화시켜서, 물론 문재인 대통령과 정권에 대한 공격이기도 하지만, 공항공사가 제보한 직접 동기는 이것이다”고 주장하며, 일련의 사태에 정치적 음모가 숨어있다고 말해 빈축을 샀다.
결국 김정호 의원은 논란이 불거진 지 닷새만인 지난 25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자신이 빚은 물의에 대해 사과했다. 김 의원은 “저의 불미스러운 언행으로 여러분께 큰 실망을 끼쳐드리고 심려케 해서 너무나 죄송하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의원의 공항 갑질은 지난해 김무성 의원의 공항 ‘노룩패스’ 논란을 상기시키며 지지층에 큰 실망감을 안겼다. 김무성 자유한국당 전 대표는 바른정당 소속이던 지난해 5월 일본 여행을 마치고 김포공항으로 입국했다. 그는 자신을 마중 나온 수행원을 쳐다보지도 않고 캐리어를 한 손으로 밀어 전달했다.
해당 영상은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상대를 보지 않고 공을 던진다'는 뜻의 스포츠 용어 '노 룩 패스'(No look pass)라 불렸다. 보수주의가 나아가야 할 길로 권위주의 타파를 말해왔던 김 전 대표가 오히려 가까운 보좌진에게 권위적인 듯한 모습을 보이며 논란이 됐다.
이와 관련해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지난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유권자들이 보수 정당에 철퇴를 내렸다. 그들이 보여준 권위주의적인 행태와 시대착오적인 발상을 심판한 것이다”라며 “그런데 최근엔 오히려 정부·여당에서 이 같은 사건들이 불거지고 있다. 몇 달 전이라면 높은 지지율에 고무됐다 치겠지만 지금은 그렇지도 않다. 현실을 자각하고 2020년 총선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이런 상황에서 집권 여당의 대표마저 최근 시대착오적인 발언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 12월 3일 국회에서 만난 찐딘중 베트남 경제부총리에게 “한국 사람이 베트남 여성들과 결혼을 아주 많이 하는데 다른 여성들보다 베트남 여성들을 아주 선호하는 편이다”라고 말했다. 여성을 단순히 남성의 선택 대상으로 여기는 차별적 관점뿐만 아니라, 문화적 차이로 인한 어려움과 가정폭력에 노출된 이들이 적지 않은 이주여성의 현실도 가벼이 여겼다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해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여성은 국적에 따라 남성으로부터 ‘선호하는 편’이라고 언급되는 ‘기호의 대상’이 아니며 결혼이주여성의 인권 보호는 우리 사회가 지혜를 모아야 할 당면 과제다”라며 “출신 국가 등에 따라 이주여성과 다문화가정을 규정하는 시각도 편협하다. 베트남 부총리에게 이런 발언을 한 것은 외교적 결례”라고 지적했다.
이 대표는 지난 9월17일 기자간담회에서도 낮은 젠더 의식을 드러낸 바 있다. “안희정 전 지사의 불륜 행위가 공직자로서 안 해야 될 일이기 때문에 제명을 바로 한 것이고 젠더와는 관련 없다”고 말하며 권력자의 ‘위력 행사 여부’가 법적 쟁점으로 붙은 사건을 ‘불륜 행위’로 치부했다. 많은 ‘미투’ 폭로자가 이른바 ‘꽃뱀’과 ‘불륜 상대’로 몰리며 2차 폭력을 겪는 현실을 외면한 채 경솔하게 발언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고정현 기자 jh0704@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