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주미대사관은 북방외교의 전초지였다
워싱턴 주미대사관은 북방외교의 전초지였다
  • 정태익
  • 입력 2018-12-21 19:53
  • 승인 2018.12.21 20:11
  • 호수 1286
  • 1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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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 오럴 히스토리] - 정태익 편
소련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 [뉴시스]
소련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 [뉴시스]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6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정태익 전 주러대사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1991년 4월 한·러 정상회담 개최… 소련 지도자 한국 땅 처음 밟았다 
노태우 대통령 최고 성과 ‘남북기본합의서’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 채택

 

- 대미관계의 걸림돌 하나가 제거된 건가?

▲ 신정부 출범과 함께 대사가 바뀌었다. 김경원 대사가 이임하고 박동진 장관이 대사로 부임했는데, 나는 계속해서 주미대사관 정무참사관으로 남아있었다. 노태우 정권은 정통성이 확보되어 대미 외교를 힘들게 하는 일은 사라졌다. 전두환 대통령이 퇴임하고 나서 바로 국정자문위원회 의장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했는데 슐츠 미국 국무장관이 구행장관 역할을 담당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을 슐츠 국무장관이 영접하는 자리에서 재미난 에피소드가 있다. 슐츠 국무장관이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단임을 약속하고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었으니 이제 조지 워싱턴과 같이 존경받으실 일만 남았다고 치켜세워주면서 대통령직을 그만두면 뭐가 달라지는지를 아느냐고 물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대답을 주저하자 슐츠 국무장관이 “우리나라에 골프를 좋아하시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계셨는데, 그분이 대통령 현직에 있을 때는 골프장의 그린만 올라가면 기브를 받았는데 퇴임하고 나서는 못 받으셨으니 각하께서도 옛날에는 기브를 잘 받으셨을지 모르지만 골프장에서 더 이상 기브를 받기는 힘드실 겁니다”라고 해서 한바탕 폭소가 쏟아졌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미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가는 날, 동생 전경환 씨가 구속되어 정권이 바뀜을 실감했다. 박동진 전 장관이 주미대사로 한·미 관계를 통솔했는데, 대미흑자로 인한 대미통상 문제 대두 이외에는 정치적으로 문제가 되는 특별한 현안이 없었다. 주미대사관 정무참사관으로 만 3년 동안 복무를 마치고 1990년 청와대 외교안보비서관으로 임명되어 귀국했다.

청와대 근무는 두 번째였다. 박정희 대통령 때 김동조 외교특보 보좌관으로 일한 적이 있다. 1990년부터 1992년까지 2년간 외교비서관으로 재직하면서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를 적극적으로 뒷받침해 소련과 중국의 역사적인 수교 달성에 기여했다.

내가 워싱턴 정무참사관으로 근무할 당시에 소련 및 동구 공산권과의 수교 문제가 중요한 현안이었지만, 우리나라가 88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고 난 후,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과 외교관계 수립이 봇물 터지듯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소련과 외교관계 수립은 미해결로 남아 있어 미국에 있는 소련전문가 교수들의 도움을 받아 소련·미국·캐나다 연구소와 채널을 구축해 소련을 접촉하기 시작했다. 미국학자들은 소련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통해서 대소련 외교의 기틀을 마련했다. 말하자만 워싱턴 주미대사관이 북방외교의 전초지 역할을 담당했다.

나중에 주한러시아대사를 역임한 예브게니 아파나시에프 참사관을 워싱턴에서 만났다. 그는 주미소련대사관 아시아 담당 정무참사관아었다. 아파나시예프 참사관과 나는 수교 전에 비밀 접촉을 시작했다. 참사관급 수준에서의 실무 접촉은 가능했으나 김경원 대사와 주미소련대사 간의 고위급 접촉은 할 수 없었다. 대사는 미국에 있는 한국인 교수들을 통해 소련 사람들과 접촉해서 대소련·대동구권 외교의 기틀을 잡는 방법으로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외교를 측방 지원했다.

나는 귀임 후 청와대에 근무하면서 북방외교의 대미를 장식할 수 있었다. 당시 김종휘 외교안보수석이 지휘하고 내가 그 밑에서 비서관으로 일했다. 외교부 출신으로는 김재섭 비서관이 같이 있었다. 이런 인연으로 나중에 저와 김재섭 비서관이 차례로 주러대사를 역임했다. 김종휘 수석을 중심으로 북방외교를 추진했고, 여기에 김종인 경제수석이 대소 경협 자금 문제를 담당해서 상호 협력했기에 소련과의 수교가 이루어진 거다.

소련과의 수교는 여러 채널을 통해 다수의 관계자들이 각자 자신의 역할을 지혜롭게 잘해냈기 때문에 성사됐다. 1990년 6월 수고 직전 노태우 대통령과 소련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나 정상회담을 가졌다. 당시에 최호중 외무장관, 이정빈 정부차관보, 김종휘 외교수석이 정상회담에 배석했다.

- 제주도 한·러 정상회담이 열린 때가 1991년 4월이었나?

▲ 그렇다. 소련 지도자가 한국 땅을 밟은 것은 처음이었다. 역사적인 대사건이었다.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제주도에 새벽 한두 시쯤에 도착해서 새벽에 정상회담을 하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청와대 근무시 관련된 또 한 가지 중요한 역사적인 사건은 남북한 UN 동시가입이다. 청와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외교부에서는 그때만 해도 UN 가입을 반대하고 중국도 합세해서 수교가 안 될 것이라는 전망이 컸는데 청와대는 중국과의 비선 채널을 통해 얻은 정보로 남북한 UN 동시가입을 강력히 밀어붙여서 성사시켰다.

청와대는 기업 등 다양한 채널이 있었기 때문에 북방외교를 주도했다. 나는 청와대 근무하는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높은 차원의 시각에서 다루는 외교 업무 처리를 경험했다.

노태우 대통령이 거양한 최고의 남북관계 성과는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을 채택한 것이다. 남북한 관계의 가장 중요한 협정이 마련된 것이다.  

정태익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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