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톡톡 튀는’ 대기업 CEO의 화술 ‘화제’

고려시대의 서희(徐熙, 942~998)는 협상가로 유명하다. 그는 993년 거란의 장수 소손녕(蕭遜寧)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로 쳐들어오자, 소손녕에게 먼저 “송나라와 국교를 끊겠소”라고 선언했다. 송나라를 견제하려는 거란의 숨은 속내를 간파했기 때문이다. 소손녕이 흡족해하며 회군하려 하자, 서희는 그의 말고삐를 잡으며 말했다. “나를 좀 살려주시오. 고려는 오랜 시간동안 송나라와 인연이 깊어 조정에는 친송파가 득세하고 있는데, 내가 이렇게 말하고 그냥 돌아가면 나는 맞아 죽을 것이오” 소손녕은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소?”라고 물었다. 서희는 머뭇거리지 않고 회심의 한 방을 날린다. “강동 6주는 돌려주시오”
탁월한 화술은 상대방을 감동시키는 것을 넘어 설득의 경지에까지 이끈다.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고 신뢰를 주는 것이 최고 화술이다. 따라서 단순한 ‘달변’과는 차이가 있다. 요즘 같은 자기 PR시대에 침묵은 ‘독’이 된다. 오히려 말 잘해야 성공하는 시대다. 특히 정치인, 최고경영자(CEO)처럼 ‘입’이 주목받는 사람에게 화술은 필수 덕목이다. [일요서울]은 화술의 달인, 각 기업 CEO가 청중,직원의 감동을 넘어서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게 만드는 그들만의 ‘독특한’ 화술에 대해 알아본다.
‘기업’이라는 거대한 배의 추진 동력은 기업의 이미지와 최고 경영자의 ‘메시지’이다. 제공하는 서비스나 제품의 품질로만 평가받던 시대는 지났다. 때문에 현대의 최고 경영자들은 자신의 생각을 직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한 의사소통 도구인 화술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제대로 갖춘 화술은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제 대기업의 최고 경영자들은 자신만의 노하우와 개성으로 독특한 화술 경영을 펼친다.
강한 한 방, ‘메세지’ 경영으로 간다
국내 재벌기업 오너들이 구사하는 화술이나 화법을 보면 일반인과는 다른 점이 많다. 지난 6월 7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이건희 신경영 17주년’을 맞아 ‘마불정제(馬不停蹄)’를 내세우며 위기의식을 강조했다. 이 회장은 삼성전자 인트라넷인 ‘마이싱글’을 통해 ‘달리는 말은 말발굽을 멈추지 않는다’는 마불정제를 전면에 내세웠다. 또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삼성은 더욱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직원들에게 주문했다. 직원을 달리는 말에 비유하며 자신의 의중을 전달한 것이다.
삼성은 마이싱글에서 ‘앞으로 10년 내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지난 3월 이 회장의 경영복귀 발언을 소개하며 “세계 1위가 되기 위해 달려온 신경영 17년으로, 지금은 안주할 때가 아닌 마불정제할 때”라고 역설했다. 삼성은 그동안 ‘신경영 체제’를 통해 메모리반도체 세게 1위, TV판매 세계 1위, LCD·OLED 시장점유율 세계 1위, 냉장고용 ARS 수지 시장점유율 세계 1위 등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뤘다. 이 회장의 역설은 지난 성과에 만족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자는 뜻을 담고 있다고 삼성 측은 설명했다.
삼성 대기업화, 그 출발점은 1993년 이 회장의 신경영체제 선포로 볼 수 있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모두 바꿔라’는 ‘신경영’ 메시지로 시작된 삼성전자의 프로세스혁신 활동은 삼성전자를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90년대 100위권 밖이었던 삼성전자의 브랜드 가치를 10년 만에 세계 19위 수준(인터브랜드 발표)으로 높였다.
삼성은 어떻게 세계 초일류 그룹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초고속 성장의 원천 동력은 바로 이건희 회장의 ‘화술’에 있다. 적절한 타이밍에 극적인 효과를 주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삼성 관계자는 “이 회장은 기상천외한 사례를 갑자기 언급하는가 하면 엄청난 속도감으로 비약을 거듭하기도 해, 만일 처음 이 회장의 말을 듣는 사람이라면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면서 “그러다가 말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되면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입을 다문 채 산다”고 말했다.
그는 “이 회장의 말이 어눌함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까닭은 그가 침묵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라며 “말이란 일정한 침묵이 배경이 되어야만 가치가 드러난다”고 덧붙였다. 가령 ‘사장보다 더 많은 월급을 주는 인재를 스카우트하라’ ‘아내와 자식 빼고는 모두 바꾸어라’ ‘아예 양(量)은 포기하고 질(質)만 따져라’ 등의 경구는 오랜 침묵 끝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진다. 이 회장은 이렇게 적절한 침묵과 한마디를 통해 긴장감을 주면서 오늘날의 삼성그룹을 만들었다.
이종휘 우리 은행장도 메시지 경영으로 그룹을 이끌어 나가는 인물이다. 이 행장은 지난 1월 창립 111주년 기념행사에 ‘풍림화산’을 들고 나왔다. 중국의 병법서 「손자」의 ‘군쟁(軍爭)’편에 나오는 사자성어이다. ‘움직일 때는 바람처럼 날쌔게, 머물 때에는 숲처럼 고요하게, 공격할 때는 불처럼 맹렬하게, 지킬 때는 산처럼 묵묵하게’ 우리은행은 2008년을 악몽같이 보냈다. 부채담보부증권(CDO)과 신용부도스와프(CDS)에서 1조6000억 원의 손실이 나 타격이 컸기 때문이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이 행장은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해 과거의 영광을 되찾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풍(風)-구조조정 날쌔게 하고, 림(林)-내실성장을 다지고, 화(火)-해외진출을 가속화하고, 산(山)-조직안정을 최우선으로’를 기조로 내세운 우리은행의 사정은 점차 나아져갔다. 명확한 이 행장의 메시지가 직원들에게 전달돼 단결했기 때문이었다.
‘친근감’으로 부드러운 경영 펼쳐
하지만 모든 그룹 최고경영자가 공통적으로 화려한 말솜씨로 직원들을 휘어잡는 것은 아니다. 대다수의 오너들이 말이 어눌하거나 세련되지 못하다. 현대·기아차 정몽구 회장은 말솜씨가 어눌한 것으로 유명하다. 청중이 많은 곳에서 강연을 할 때는 사람 이름, 제품명 등을 혼동해서 얘기해 관계자들을 놀라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을 정도다. 하지만 정 회장은 부하직원이나 친숙한 사람과의 대화에서는 꽤 말을 잘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현란한 화술로 상대방의 마음을 훔치는 것이 아니라 친숙하게 다가가 상대방에게 자신의 진심을 내비쳐 설득하는 ‘친밀형’이다. 때문에 낯선 사람이 많은 공식행사에만 서면 정 회장의 말솜씨가 빛을 보지 못한다는 평가다. 그래서 비서진들은 정 회장이 공식석상이나 재계 모임에 갈 때마다 미리 대본을 준비한다. 정 회장도 이를 빈틈없이 숙지한다. 현대·기아차 관계자는 “오너의 말솜씨는 경영에서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정 회장의 경우 경영 능력을 인정받았고 탁월한 감각을 갖고 있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구본무 LG그룹 회장도 논리 있는 연설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직원이나 청중들에게 친근하게 다가서는 유형이다. 업계 관계자는 “구 회장은 소탈하고 푸근한 인상에서 말해주듯 성격도 털털하고 격식을 따지지 않는 성격이다”라고 털어놨다. 동네 아저씨같이 모임에서도 트로트를 맛깔나게 불러 청중을 사로잡고, 직원들에게도 서슴없이 말을 건넨다. 이런 탓에 구 회장은 자신의 얘기보다는 상대방의 얘기를 경청하는 성격의 소유자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고 그것에 대한 문제점 내지 보완점을 거론하는 정도에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이 때문에 직원들은 어렵게만 느껴지는 ‘회장님’에게 자신의 소신 있는 의견을 주장하기도 한다. 구 회장이 또 다른 기업의 최고 경영자와 다른 점은 바로 유머 감각이다. 다양한 유머를 통해 상대방과의 친밀감을 높이고 유쾌한 기억을 갖게끔 하는 것이 구 회장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이다. 구 회장의 경우 이런 유머러스한 부분이 경영에서도 그대로 반영된다. 웃음이 가장 강려한 무기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는 경영에서도 ‘부드러운 리더십 경영’을 표방하고 있다.
그는 지난 1월에 “소수 리더만으론 변화를 주도할 수 없다”며 “상상력을 발휘해 과감한 혁신을 이루는 게 중요하다”고 언급하며 다시 한 번 ‘양방향 커뮤니케이션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스마트폰 등 첨단 과학 적극 활용해
첨단 IT기술을 적극 활용하며, 소비자와 직접적인 대화를 시도하는 최고 경영자도 있다. 박용만 두산 회장이다. 그는 트위터에서 일반인들과 직접 의견을 주고받으며, 소통하고 있다. 지난 6월 2일, 드디어(?) 1만 트위트(tweet)를 달성했다는 박 회장. 140글자로 이뤄진 짧은 글을 주고 받으며 소통하는 트위터에서 1번 트윗을 할 때 보통 100글자를 올린다고 가정하면 1만 트위트를 했다는 것은 200자 원고지 5000장 분량의 글을 올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편 소설의 분량이 원고지 600~700장 내외인 것을 감안하면 최소한 7~8권의 글을 썼다는 것이다. 그만큼 활발한 소통을 하고 있다는 의미다. 자신의 일상을 솔직히 공개하고, 젊은이들만이 쓰는 속어를 사용해 웃음 넘치는 글을 던지는 그를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추종자(팔로어, Follwer)의 수는 현재 4만5400명을 넘어섰다. 또한 박 회장이 남긴 글들은 어록으로 정리돼 온라인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우선미 기자] wihtsm@dailypot.co.kr
# ▷ 두산 박용만 회장 어록(?)
- 회장님은 결혼기념일 어떻게 챙기시나요.
▲ 압구정동 걸어가다가 길 한복판서 느닷없이 키스를 퍼부으세요^^
- 자판기가 돈 먹었어요… 나쁜 자판기!! 내 아까운 천 원.
▲ 자판기는 동전투입구가 고장날 때를 대비해서 발로 냅다 걷어차기 기능이 대부분 장착돼 나오는데요.
- 저는 두산응원하구요~! 제 친구는 LG 응원합니다. 근데 전 LG 다니구요. 제 친구는 두산 다닙니다.
▲ 두 분이 그룹사운드 만드세요. The 배신s.
- 하고 싶은 일과 잘하는 일 사이에 갈등 중입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에는 갖고 있는 환경이 힘들어 질 것 같고 잘하는 일을 하기엔 삶이 너무 재미없어요.
▲ 잘하는 일을 먼저 해서 인생을 순탄대로에 올리면 하고픈 일 하기가 쉬워질 겁니다.
우선미 기자 wihtsm@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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