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 | 고정현 기자] '양승태 사법 농단’ 파문으로 촉발된 검찰과 법원 간 갈등이 전면전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양 전 대법원장 시절 ‘사법 농단’ 의혹의 핵심 피의자인 박병대(61·사법연수원 12기) 전 대법관과 고영한(63·11기) 전 대법관 구속 영장을 법원이 기각하면 서다. 법조계 안팎에선 법원이 단순히 법리로만 구속 여부를 판가름하기보단 전직 대법관 구속에 따른 파장을 고려했을 거란 분석이 나온다. 검찰은 이들에 대한 구속영장을 재청구하기 위해 보강 수사에 돌입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엔 음주운전 사고로 동승자를 전신마비에 이르게 한 운전자에 대한 구속 영장까지 기각이 되면서 사법부에 대한 국민적 공분도 극에 달한 실정이다. 국회 현안에 가려져 있었던 특별재판부 설치 문제에 다시 불이 붙을 것으로 관측되는 가운데 일각에서는 법원-검찰 간 갈등이 결국엔 문재인 정부의 지지부진한 사법개혁에서 기인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 檢-法 갈등, 극에 달한 사법부 불신... 정작 文 정부 사법개혁은 ‘지지부진’
- “조국=사법개혁 상징”... ‘조국 지키기’ 올인했던 민주당, 현안 파묻혀 사법개혁 뒷전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연루된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되면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향한 검찰 수사도 험로가 예상된다.
검찰은 전직 두 대법관의 신병을 확보한 뒤 사법 농단 의혹의 정점으로 불리는 양 전 대법원장까지 단숨에 치고 올라가려 했지만, 길목에서 차단당한 모양새다. 9일 법조계 안팎에서는 ‘양승태 사법부’를 둘러싼 의혹을 올해 안에 모두 규명해 수사를 마무리 지으려 했던 검찰의 계획에 빨간불이 켜졌다는 관측이 나온다.
檢, 영장 재청구 한다지만...
법조계 “쉽지 않을 것”
두 사람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된 뒤 검찰 내부는 상당히 격앙된 분위기인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중앙지검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수사단(단장 한동훈 3차장 검사)은 법원이 영장을 기각하자 곧바로 “재판의 독립을 훼손한 반(反)헌법적 중범죄의 규명을 막는 것으로서 대단히 부당하다”며 반발했다.
검찰은 법원이 사실상 이 사건을 임종헌 전 행정처 차장 선에서 ‘꼬리 자르기’하려는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다. 법원은 지난 10월 27일 임 전 차장을 구속하며 “범죄 사실 중 상당 부분에 대해 소명이 있고 수사 경과 등에 비춰볼 때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임 전 차장의 상급자였던 두 전 처장에 대해서는 공모 여부에 의문이 있다며 영장을 기각했다. 임 전 차장의 영장심사를 맡기도 했던 임민성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박 전 처장에 대해 “공모관계의 성립에 대해 의문의 여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검찰은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에 대한 보강수사를 진행한 뒤 구속영장을 재청구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재청구는 힘들 것이라는 게 법조계 중론이다.
부장검사 출신의 A변호사는 “검찰이 전직 대법관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하면서, 명확하지 않은 증거와 진술을 확보하지 않았을 리 없다”며 “그럼에도 법원이 영장을 기각했기 때문에, 보강수사를 한다고 하더라도 뚜렷한 범죄 혐의를 추가로 발견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검찰이 이미 두 사람을 수차례 소환해 조사하고 자택과 사무실까지 압수 수색하는 등 동원할 수 있는 강제수사 카드를 모두 사용했다. 또 전·현직 판사 수십 명을 불러 관련 진술까지 확보한 이후 100여 쪽에 달하는 구속영장 청구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하지만 법원은 구속의 필요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고, 검찰이 보강수사를 벌인다고 하더라도 현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확실한 범죄사실을 추가로 밝혀내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이처럼 검찰과 법원 간 갈등이 ‘전면전’ 양상으로 번지고 있는 가운데 일각에서는 문재인 정부의 지지부진한 사법개혁이 기름을 부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당장 지난 10일 법원이 음주운전을 하다가 사고를 내 동승자를 전신마비에 이르게 한 20대 운전자에 대한 구속 영장을 기각하면서 국민들 사이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청주지법은 지난달 29일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위험운전치상 혐의로 구속 영장이 청구된 A(26)씨에 대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진행한 뒤 영장을 기각했다. 도형석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음주 사고의 발생 경위, 수사 과정, 수집된 증거 등을 비추어 볼 때 현 단계에서 구속 수사의 필요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기각 사유를 설명했다.
정부·여당, 조국은 지켰지만...
사법개혁은 어디로?
상황이 이렇다 보니 법원-검찰 간 갈등의 불똥이 문재인 정부의 지지부진한 사법개혁에 대한 비난으로 옮겨 붙는 모양새다. 시민사회 각계 원로들은 13일 사법 적폐 청산과 사법개혁을 호소하는 시국선언을 내며 특별재판부 도입을 촉구하고 나섰다.
시민사회 원로 50명과 시민사회단체 대표 16명(김중배 MBC 전 사장,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함세웅 신부, 송두환 민변 전 회장, 권영길 민주노총 지도위원, 박덕신 목사, 김정헌 416재단 이사장 등)은 13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개최한 시국선언에서 “사법부 자정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된 시점에서 국회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풀 것을 다시 한번 촉구한다”며 “적폐 법관들을 지체 없이 탄핵 소추하고, 영장 발부와 재판을 담당할 특별재판부 설치와 특별 재심요건 등을 입법화하는 특별법을 제정하는 것이 거의 유일한 방안”이라고 촉구했다.
특히 이 같은 분위기는 문재인 대통령이 야권의 ‘조국 책임론’을 묵살하고 조 수석을 신뢰한 것과 맞물려 더욱 극으로 치닫고 있다. 문 대통령이 야권의 반발이 불 보듯 뻔한데도 조 수석을 신뢰한 배경에는 사법개혁을 완수하려는 의지가 작용한 것으로 정치권은 판단한다.
조 수석이 중도에 물러난다면 문 대통령이 핵심 국정과제로 삼은 사법·검찰 개혁,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신설과 검경 수사권 조정 등에 차질이 생기거나 동력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 역시 지난 4일 특별감찰반 내 일탈행위에 대해 단호한 대처로 대응하고, 청와대 내부 기강을 강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직원 개인의 처세를 빌미로 민정수석에게까지 책임지라는 것은 정치적 의도가 다분한 공세”라며 “공수처 신설, 검경수사권 조정 등 문재인 정부의 사법개혁을 이끌고 있는 조국 민정수석에 대한 과도한 경질요구는 문재인 정부의 사법개혁을 좌초 시키겠다는 특권 세력의 반칙”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정작 더불어민주당은 최근 내년도 예산안 처리와 선거제도 개편 등 국회 현안에 집중하면서 법관 탄핵소추와 특별재판부 설치에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상황이다. 한 법조계 인사는 “법관 탄핵과 특별 재판부 설치는 현 사법부를 견제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장치”라며 “여권 입장에서 마음만 먹는다면 둘 중 하나 정도는 취사선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정현 기자 jh0704@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