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함께하는 삶을 꿈꾼다

미래 기업의 핵심역량 중 하나는 학습문화이다. 그리고 뛰어난 리더십의 불가결한 요소는 리더의 솔선수범이다. 솔선수범해서 열심히 독서하는 CEO의 모습은 그 자체로 기업의 경쟁력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시대를 이끌어가는 ‘재계 고수들’의 특별한 성공 지혜법은 무엇일까. 올 초 출간된 <책 읽는 CEO><비즈니스북스>는 이런 물음에 대해 해답을 제시한다.
이 책은 리더십과 학습문화의 융합이라는 바람직한 경영패러다임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경영교과서로 자리매김한다. 이에 [일요서울]은 LS전선 구자열 회장을 필두로 한국 최고경영자들의 학습관에 대해 알아본다. 이번호는 SK에너지 신헌철 부회장편이다.
SK에너지 신헌철 부회장에 대한 기사를 보면 꼭 따라붙는 말이 있다. 일종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것이다. ‘신헌철 부회장을 한 번 알면 신헌철맨이 된다’
설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설마는 신 부회장을 만난 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깨져버렸다. 더위가 찾아오기 시작한 초여름날, 서울 청계천변에 자리 잡고 있는 SK에너지 사옥을 찾았다.
신 부회장의 사무실은 25층이었다. 접객실 같아 보이는 사무실 전면엔 통유리가 설치되어 있어 여름 하늘과 서울 시내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인터뷰를 시작하기 십여 분 전인지라 구경도 할 겸 자리에서 일어나 둘러봤다. 유리창 아래로 종로 일대가 시원하게 펼쳐졌다.
사무실 곳곳엔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함께 세계 각지의 사업장에서 찍은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또 한 켠에는 신 부회장이 2004년에 만든 사외이사 윤리강령이 큼지막한 액자에 걸려 있었다. 그러나 사무실 분위기만으로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끝내 종잡을 수가 없었다.
얼마 안 있어 다부진 체격의 신헌철 부회장이 들어왔다. 손에는 책 두어 권과 종이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바쁜 일정 중에 시간을 낸 듯 자리에 앉고 나서 비서에게 경상도 억양으로 다음 일정을 20분 늦추라고 했다.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사람들 사이에 회자됐던 대표이사 퇴임식 이야기를 슬쩍 꺼냈다. 신 부회장은 2003년부터 SK에너지 대표이사 자리를 맡으면서 재임기간에 회사 매출과 영업이익을 3배나 올려놓는 신화를 일궈놓았다.
그는 최근 대표이사 자리에서 물러나 경영 임원으로 돌아갔다. 신 부회장은 이임식에도 색다르게 했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를 인용해 인사말로 대신한 것이다.
퇴임식 이야기가 나오자 그가 슬며시 입 꼬리를 올렸다. 물어볼 줄 알았다는 표정 같았다. 그는 경영에서 물러나는 게 아니니까 걱정 말라고 했다. 대표이사가 아니라고 해서 경영에서 손을 땐다는 뜻은 아니라는 소리다.
사실 그가 재직 당시에 이뤄낸 것들을 감안하면 외부인 입장에선 걱정이 슬슬 될 만한 일이었다.
SK와 모나코에 근거지를 두고 있은 외국계 자산운용사인 소버린이 경영권분쟁을 벌였을 때나 SK그룹이 지주회사 체제로 출범하는 격변기에는 늘 그가 굳건한 버팀목이 되었기 때문.
‘이임사’로 화제를 돌렸다. 그는 이임사 말미에 도종환 시인의 ‘접시 꽃 당신’을 읊었다. 그가 뽑아든 시 구절은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라는 마지막 부분이었다. 왜 도종한 시인의 시냐고 했더니 “그 부분이 그렇게 마음에 와 닿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평소 사회공헌에 뜻을 품고 있는 신 부회자은 자신의 살을 떼어주고 가는 삶을 살고 싶다고 덧붙였다.
책 이야기로 말머리를 돌렸다. 신 부회장은 “책은 사면 다 읽고 싶은데 꼭 보면 좋은 책만 자꾸 읽게 되더라”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00700’으로 유명한 SK텔링크 사장으로 있을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읽었다. 역사물을 좋아해 <삼국지>와 <수호지>도 수없이 읽었다.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한 그는 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문체가 마음에 꼭 들어 그 책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성벽 해자 옆으로 보리꽃 물결이 솟아오른다’로 첫 문장이 시작되는 터라 동양적이잖아요. 그 소설이 그렇게 좋아 세 번을 읽었어요. 다 하면 69권을 읽은 셈이 되나?”
고 박경리 선생의 <토지>도 손에 꼽을 정도로 좋아하는 책이다. 하도 좋아서 <토지>를 재연한 마을에 다녀오기도 했다. “평사리 마을 가봤어요? 나는 시골에 살아서 그런지 토지 마을에 갔는데 가슴에 뭐가 푸르른 빛이 지나가는 것 같더라고요. 주변에서 손만 대면 사업이 잘된다고 ‘미다스의 손’이라고 하는데 사실 그건 아니에요. 운이 좋고 타이밍이 좋았던 거죠. 2007년이었지요. 2008년 단기 계획을 세우고 중기 경영 계획을 세우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어요. 당시에 SK에너지가 30~40퍼센트 밖에 수출을 안 했던 터라 수출을 늘리는 수밖에 없었지요. 그때 시오노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가 떠오릅디다. 지인이 그 책을 출간한 출판사를 운영했는데 한꺼번에 많이 사면 할인을 해준대요<웃음>. 그래서 그 책을 직원들과 한 달에 한권씩 읽기 시작했죠“
<로마인 이야기>는 SK에너지로 옮겨오기 전인 SK가스에서 미리 임직원들과 함께 읽기 시작한 책이었다. 회사를 옮기고 나서 까맣게 잊고 지내다가 ‘아~글로벌!’이란 생각이 퍼뜩 들었다고 했다.
그렇게 <로마인 이야기> 읽기 레이스가 이어졌다. 한 달에 한권. 직원들과 함께 차분히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신 부회장은 그냥 책 읽는 것만으로는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은 모두 담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놓은 아이디어가 내부 게시판이었다. 사내 온라인 게시판에 별도로 창을 만들어 직원들이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도록 했다.
직원들은 망설임 없이 <로마인 이야기>를 읽어가며 ‘SK에너지 경영 제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직원들이 올린 것은 때로는 따끔한 질책이 되기도 했고 때로는 무릎을 탁 칠만 한 경영아이디어가 되기도 했다.
SK에너지 직원 2000명 가운데 600명에 달하는 직원들이 <로마인 이야기>를 읽었을 정도로 반응이 폭발적이었던 것을 두고 신 부회장은 ‘기적과 같은 일’이라 했다.
신 부회장은 두툼한 노트를 하나 보여줬다. <로마인 이야기> 제 5권을 읽고 직원들이 올린 제언을 묶은 일종의 책이었다. 그만큼 신 부회장은 <로마인 이야기>를 통해 경영철학을 확고히 했음을 짐작케 한다.
[정리=이범희 기자] skycros@dailysun.co.kr
[자료제공:비즈니스북스]
정리=이범희 기자 skycros@da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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