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광그룹 창업자 무덤 도굴사건 내막
태광그룹 창업자 무덤 도굴사건 내막
  • 우선미 기자
  • 입력 2010-02-02 11:34
  • 승인 2010.02.02 11:34
  • 호수 823
  • 21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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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가 무덤은 내 지갑!”

재벌가의 무덤만 전문적으로 파헤친 도굴꾼이 경찰에 덜미를 잡혔다. 포항북부경찰서는 지난달 28일 태광그룹 창업자 고(故)이임용 전 회장의 묘지를 도굴해 유골을 훔친 혐의(분묘발굴 및 사체 등 영득)로 정모(49)씨를 검거했다. 정씨는 지난달 26일 이 전 회장의 유골을 훔친 뒤 곧장 유족들에게 전화를 걸어 현금 10억원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수차례 태광 측과 접촉하면서 위치추적을 피하기 위해 통화 시간을 조절하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경찰은 태광그룹 측의 신고를 받고 수사에 착수한 지 이틀 만에 정씨를 붙잡을 수 있었다. 과거 1999년과 2004년 발생한 재벌가 묘지 도굴 사건의 범인과 범행수법이 판박이였던 까닭에 범인으로 검거됐던 정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한 것이다.


5년 주기로 범행 왜?

정씨가 지난 1999년과 2004년에도 대기업의 종묘를 도굴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의 과거 전과와 행적들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정씨는 지난 1992년 특수절도 혐의로 복역한 전력이 있다.

출소 뒤인 1999년 수천만원대의 빚을 진 정씨는 A그룹 B회장의 일대기를 읽고 범행을 계획했다. B회장 부친의 묘를 도굴해 유족인 B회장으로부터 거액을 뜯어낼 속셈이었던 것.

정씨는 공범 임씨와 손잡고 1999년 3월 3일 경상남도의 야산에 위치한 A그룹 B회장 선친의 묘소를 깊이 2미터가량 파헤친 뒤 유골의 머리 부분을 훔쳤다. 도굴에 성공한 정씨 일당은 B회장의 비서실로 전화를 걸어 협박을 시작했다.

경찰에 따르면 정씨는 유골을 돌려주는 조건으로 B회장 측에 8억원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수사 착수 나흘 만에 인근 주민의 결정적 제보로 정씨 일당은 검거됐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옥살이를 마치고 사회로 나온 정씨는 지난 2004년 10월 또 다른 범행을 저질렀다. 출소한지 꼭 1년 만이었다. 이번 목표물은 C그룹, D회장의 조부 묘였다. 또 다른 일당 3명을 모은 정씨는 봉문 정면이 아닌 측면을 노리는 요령을 부렸다.

봉분 왼편 3분의 1지점에 가로 50cm, 세로 1.5m, 깊이 2m 정도의 구멍을 뚫고 기구를 넣어 유골을 훔친 것이다. 봉분 안 왼쪽에는 D회장 조부, 오른쪽에는 조모의 유해가 안장돼 있었다. 정씨 일당은 이 중 조부의 유골에만 손을 댔다.

‘거사’를 위해 준비도 철저히 했다. 일당은 한 달 동안 세 차례에 걸쳐 현장 답사를 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D회장 조부의 두개골과 팔, 뼈 등을 도굴한 일당은 곧 서울 C그룹 본사 비서실로 협박전화를 걸었다. 이들은 당시 훔친 유골을 플라스틱 통에 넣어 충북 옥천군에 있는 한 야산에 묻어 둔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D회장 측이 경찰에 수사를 의뢰하면서 계획은 실패했고 일당은 경기도, 대전 등지에서 도피생활을 했지만 수사망을 피할 순 없었다. 다시 5년의 옥살이를 해야했다. 그는 그간의 실수를 만회라도 하듯 지난달 26일 태광그룹 창업자 이임용 전 회장의 무덤을 노렸다.

5년의 범행주기는 바로 정씨의 수감기간 탓이었다. 경찰 관계자는 “정씨가 17살이던 1979년 절도와 횡령 등 혐의로 경찰에 처음 입건됐고 1983년 특수강도 행각을 벌이다 검거되는 등 최근까지 교도소를 계속 들락거린 것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왜 재벌가만 노렸나

정씨는 왜 10년이 넘는 수감생활을 감수하면서까지 재벌가의 무덤을 노렸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먼저 종묘를 지키는 경비 인력이 따로 없기 때문에 무덤을 파헤치고 유골을 훔치는 것은 다른 절도범죄에 비해 쉽기 때문이다. 물론 CCTV가 설치된 지역도 있었지만 밤에 활동하는 도굴꾼에게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

또 범행이 쉬운 반면 얻을 수 있는 이익은 굉장히 크다는 점이다. 재벌가 종묘는 외관과 명성 때문에 유가족을 찾는 게 쉽다. 또 일반인에 비해 유족을 상대로 거액을 요구하는 것이 용이하다.

여기에 시신을 매장할 때 생전 유품을 함께 묻는 관습이 있어 재벌가 종묘의 경우 값비싼 부장품을 덤으로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점도 범행동기가 됐을 수 있다. 실제로 정씨는 1999년 A그룹 B회장 부친 묘 도굴사건으로 검거된 뒤 경찰 조사에서 “B회장이 그룹 총수인 만큼 부친 묘에 부장품이 많을 것 같아 도굴했다”고 말했었다.

납치나 유괴에 비해 유골 절도는 처벌 수위가 낮다는 점도 이 같은 범죄를 부추기는 요인일 수 있다. 유골을 훔쳤다 검거될 경우 분묘 발굴 및 시체 영득죄가 적용돼 살인죄, 납치죄보다 비교적 형사 처벌 수위가 낮다.

마지막으로, 피해자들이 피해 신고를 할 확률도 적다는 것 역시 무시할 수 없다. 경찰 관계자는 “도굴을 당하더라도 기업이미지 등을 고려해 신고를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정씨도 이런 계산으로 재벌가 무덤을 노렸을 것”이라 분석했다.

실제 재벌기업의 한 관계자는 <일요서울>과의 인터뷰에서 “오래전 사건이지만 아직도 회사에서는 우리 회장님의 조부모 묘 도굴 사건을 입에 담길 꺼려하는 분위기다”며 “인터뷰에 응하지 못하는 입장을 이해해 달라”고 말했다.

[우선미 기자] wihtsm@naver.com

우선미 기자 wihtsm@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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