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계에서 손꼽히는 대다수 기업들은 대를 이어 내려오는 신뢰를 자랑한다. 그리고 그 경영자들에게는 오랫동안 역동의 시대를 거쳐 기업을 성장시키는 것과 동시에 자녀를 강하고 훌륭하게 키우는 확고한 원칙이 있다. 부를 일구는 것보다 부를 다스리는 법을 어릴 때부터 가르치고, 조직을 관리하는 법을 학습시킨다. 그렇다면 ‘재계의 고수’인 창업주들은 그들의 자녀에게 어떤 교육법을 선사할까. 지난해 출간된 <명문 기업가의 자식농사><밀리언하우스>는 이런 물음에 대해 해답을 제시한다. 이에 [일요서울]은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자녀교육법을 필두로 한국 최고 경영인들의 자식 농사법을 알아본다. 이번호는 샘표식품 박규회 회장의 자식 농사법이다.
“나물 먹고 물마시고 팔베개를 해도 즐거움이 그 속에 있으니, 옳지 못한 부귀는 나에게는 뜬구름일 뿐이다”
“한학을 공부한 선친께서 특히 좋아하시던 구절입니다. 깨끗하고 투명한 삶과 경영을 펼치라는 뜻에서 저에게도 누누이 강조했던 문구입니다.
박승복 샘표식품 회장은 선친에게 물려받은 가훈을 자녀교육의 중요한 원칙으로 삼고 있다. 박승복 회장은 부친인 고 박규회 회장으로부터 물려받은 ‘청백리’와 ‘근검절약’의 생활태도를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 그 역시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이런 모습을 자녀들이 계속 이어받게 하려고 가르치고 있다. 국내 간장시장의 50%를 점유하고 있는 샘표식품은 창업주인 고 박규회 회장을 거쳐 지금의 박승복 회장과 아들 박진선 사장에 이르기까지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대표적인 가족기업이다. 국내 대표적인 장수기업인 샘표식품은 국내 최고 브랜드 가운데 하나인 ‘샘표(1954년 등록)’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재계에선 찾아보기 힘든 ‘자율교육’의 모범을 보여주는 기업이기도 하다.
박승복 회장은 지금도 달력 뒷면을 사용하여 메모하는 것을 즐긴다. 궁상을 떨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돈이 없어서는 더더욱 아니다. 그냥 수년 동안 몸에 밴 습관일 뿐이다.
달력 뒷면을 활용(?)하는 지혜는 선친의 뒷모습을 통해 자연스럽게 배우게 됐다고 한다. 그가 중학교 시절 아버지가 밤새워 공부를 하며 달력에 메모하는 모습을 종종 봐왔던 것이다.
“아버지가 몸 소 실천하시는 걸 보고 배웠죠. 중학교 때 금융조합(지금 농협)에 다니셨는데, 승진 시험을 위해 아버지가 밤새워 공부하시면서 달력 뒷장을 사용하는 모습을 옆에서 눈여겨봤지요.”
박승복 회장은 선친에 대해 자율을 내세운 교육 원칙을 강조하였다고 회고한다. “아버지는 평소에도 ‘이렇게 저렇게’하라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어요. 살아가는 것 그 자체로 교육을 하셨지요. 달력 뒷장에 메모하는 모습이 어릴 때 참 인상적이었는데, 그래서 난 지금도 따라 합니다. 이런 걸 누가 시킨다고 할 수 있나요”
‘종이 아껴써라. 펜 아껴서라, 사람이 없으면 방에 불 은 꺼 두어라’ 등등 자녀를 쫓아다니면서 잔소리를 하거나 꾸중을 하는 부모와는 달리, 박규회 회장은 일상에서 자녀들이 몸소 체험할 수 있도록 늘 스스로 아껴쓰는 자세를 생활해온 것이다.
달력에 메모하는 모습의 아버지를 보고 자란 박승복 회장이 특별히 제작된 메모지를 사기 위해 돈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주변에서 사용하던 문건을 재활용하는 습관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박 회장의 이런 ‘뒷모습’은 아들인 진선씨가 다시 되물림하고 있다. 진선씨도 선친을 이어 알뜰살뜰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 것.
진선씨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96연식 차를 타고 다녔다. 무려 40만km를 뛴 차다. 시민단체에서 펼치고 있는 ‘자동차 10년 타기’절약 캠페인이 무색할 정도다.
그는 또 야근 때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어김없이 회사 구내식당을 찾아 저녁을 해결한다.
진선씨의 이런 검소한 자세는 선친과 관련된 일화 때문에 더욱 견고해졌다. 박승복 회장이 공무원이던 시절, 박 회장은 명절이나 각종 경조사때 사람들이 선물을 갖고 오면 일절 못 받게 했다. 당시만 해도 선물을 받는 것은 관행이었고 심지어 돈까지 은밀히 받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진선씨의 모친이 정말 남편과 개인적으로 친한 분이라고 생각해서 선물을 받아뒀다. 그날 불호령이 떨어졌고, 모친은 정신을 잃을 정도로 크게 혼이 났다.
그 사건 이후 아들인 진선씨는 ‘말 뿐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러시는구나’하며 몸가짐을 더욱 조심하게 됐다.
근검절약정신은 기업운영에도 반영돼 불필요한 돈은 절대 쓰지 않고, 회사 돈과 개인 돈을 철저히 구분한다. 진선씨의 법인카드 사용액은 100만원 내외. 개인일인지 회사일인지 모호한 경우는 반드시 개인카드 사용을 철칙으로 삼고 있다. 이런 투명한 일처리 덕택에 임직원들도 경영진을 믿고 따른다.
자녀가 사회에 나가기 전에 필요한 기본적인 인격과 가르침을 배우는 곳이 가정이다.
가정교육이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면 자녀는 사회에 나가 정서적인 혼란을 겪게 된다. 이 때 부모가 끈기와 인내심을 가지고 몸 소 자녀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줄 때, 자녀는 든든한 믿음을 가지고 이를 사회생활의 밑거름으로 삼게 된다.
지나친 경쟁 위주로 흐르는 요즘의 교육 세태를 볼 때 박 회장의 교육 철학은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하다.
샘표식품은 오랜 역사만큼이나 독특한 가업을 물려주기 방식으로 유명하다. 통상 재벌가 후계자들은 대학 졸업 후 일찌감치 회사에 입사해 실무부서를 두루 돌며 경영수업을 받는다. 대부분은 단시간 내에 이사나 전무로 고속 승진하여 사장을 맡는 것이 관행이다.
능력이 검증돼야 일 맡긴다
이런 과정에서 경험 및 자질 부족에 따른 시행착오도 발생한다. 적지 않은 재계 2세들이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은 기업을 의욕만 앞세워 무모하게 확장시키려다 도산이라는 쓴잔을 마시기도 한다. 하지만 샘표식품은 조금 다르다. 한창 젊은 시절에는 대부분 본인이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한다. 부모도 적극 권장한다. 그러다가 스스로 자기 분야에서 능력을 입증할 때쯤 기업을 물려받을 자격이 주어진다.
박 회장도 55세가 돼서야 샘표식품에 입사했다. 그는 함흥공입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산업은행을 거쳐 국무총리실 행정조정실장을 거쳤다. 은행원에서 공무원을 거쳐 경영자로 몸바꿈을 세 번이나 한 셈이다.
박 회장의 아들인 진선씨의 경력은 더 다채롭다. 경기고와 서울대학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전자공학 석사를 마쳤다. 이후 박사학위를 받고 강단에 섰다.
교수 생활을 하던 진선씨는 38세가 돼서야 회사에 들어왔다. 그의 장남 역시 서울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했고 지금은 벤처기업에서 가업과는 전혀 다른 분야의 일을 하고 있다. 다소 생뚱맞은 후계자 교육은 “본인이 원하는 분야에서 일하며 세상을 보는 안목을 키워야 경영자로서 종합적인 판단이 가능할 뿐 아니라 사회나 문화를 보는 시각도 갖출 수 있다”는 박 회장의 지론 때문이다.
[정리=이범희 기자] skycros@dailysun.co.kr
[자료제공:밀리언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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