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 기업가의 자식농사 제7탄 - 에이스침대家
명문 기업가의 자식농사 제7탄 - 에이스침대家
  • 정리=이범희 기자
  • 입력 2010-01-12 11:34
  • 승인 2010.01.12 11:34
  • 호수 820
  • 25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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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노는 놈이 크게 성공한다”

재계에서 손꼽히는 대다수 기업들은 대를 이어 내려오는 신뢰를 자랑한다. 그리고 그 경영자들에게는 오랫동안 역동의 시대를 거쳐 기업을 성장시키는 것과 동시에 자녀를 강하고 훌륭하게 키우는 확고한 원칙이 있다. 부를 일구는 것보다 부를 다스리는 법을 어릴 때부터 가르치고, 조직을 관리하는 법을 학습시킨다. 그렇다면 ‘재계의 고수’인 창업주들은 그들의 자녀에게 어떤 교육법을 선사할까. 지난해 출간된 <명문 기업가의 자식농사><밀리언하우스>는 이런 물음에 대해 해답을 제시한다. 이에 [일요서울]은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자녀교육법을 필두로 한국 최고 경영인들의 자식 농사법을 알아본다. 이번호는 에이스 침대 안유수 회장의 자식 농사법이다.

안성호 에이스침대 사장과 안정호 시몬스침대 사장은 경쟁사의 대표이사이면서 형과 동생사이다. 이들의 아버지는 에이스침대 창업주인 안유수 회장이다.

이들 형제가 만든 침대에 ‘한국 사람의 절반 이상이 잠을 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시장지배력이 막강하다.

자칫 치열한 시장경쟁과 가업승계 속에서 형제간의 다툼 얘기도 들릴 법한데 오히려 두 형제가 똘똘 뭉쳐서 침대시장을 잡아먹는다는 얘기뿐이다.

비결이 뭘까. 두 형제가 이렇게 분쟁 없는 경쟁을 통해 시너지를 발휘하고 있는 데는 아버지 안유수 회장이 가업만 승계하지 않고 경영철학까지 함께 가르쳤기 때문이다.

큰아들인 성호씨는 대학 시절 방학이면 으레 당시 에이스침대 음성공장에서 주급을 받고 생산직 아르바이트를 했다. 말이 생산직 아르바이트지, 등짐을 지는 허드렛일이 대부분이었다.

직원들에게 혼이 난 적도 많았다. 사실 본인이 하고 싶어 했던 일은 아니다. 부친인 안유수 회장이 용돈이나 학비를 되도록 자신의 힘으로 벌도록 가르쳤기 때문이다.

성호씨는 부친에게서 꼭 필요한 만큼의 용돈 외에는 넉넉하게 받아본 적이 없다. 필요한 돈은 자신이 알아서 해결하는 것이 기본 방침일 정도로 돈 관리하는 법을 엄격하게 교육받았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이처럼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용돈은 주급으로 3만원씩 받았다. 책값은 영수증으로 처리해주었다. 그때도 틈틈이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수 밖에 없었다.

훗날 안유수 회장의 짠돌이 경영은 성호·정호 두 아들의 ‘무차입’ 경영이라는 전례 없는 경쟁력을 낳게 된다.

물론 안유수 회장이 단순히 큰 아들에게 노동의 소중함을 가르치려고 음성공장에서 일하도록 시켰을 리 만무하다. 경영자로서 자녀들이 경쟁력을 갖출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즉 “경영인은 늘 현장을 돌볼 줄 알아야 하고 현장 중심의 경영을 해야 한다”는 안 회장의 속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이다.


탁월한 1등이 돼라

“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 과학입니다!”

이 한편의 CF로 침대의 기본관념을 확 바꿔버린 에이스침대의 안유수 회장. 그는 온돌에 이부자리 일색이던 국내 침실 문화에 침대라는 새로운 문화를 소개한 주인공이다. 북한 황해도 사리원이 고향인 안 회장은 6·25 전쟁 당시 혈혈단신 남쪽으로 내려와 연 매출 2000억 원대 침대회사인 에이스침대를 설립했다. 독학으로 대학까지 마치고 창업을 해서 회사를 정상에 올려놓은, 말 그대로 자수성가한 경영자다.

전쟁 당시 남하하여 미군 부대의 잡역부가 된 그는 밤이면 미국인이 준 야전침대에서 잠이 드는 고단한 생활을 보냈다.

살을 에는 듯 한 겨울 혹한을 매일같이 야전침대 하나로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언젠가는 푹신한 매트리스를 깔고 잘 수 있는 침대를 만들겠다는 꿈 때문이었다. 이것이 현재의 에이스침대가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어느 날 종로 3가를 거닐다가 우연히 가구점 앞을 지나게 되었다. 그때 그의 눈에 가구점 안의 침대가 들어왔고, 문득 전쟁 통에 자신이 깔고 자던 미국용 야전침대가 떠올랐다.

이후 그는 침대사업에 대한 뜻을 굳히게 되었고 10년 후인 1963년 에이스침대를 설립한다. 이후에도 장인정신을 발휘 수십 년간 한 우물을 파고 있다.

여기에는 안유수 회장이 물려준 두 번째 정신적 자산, 즉 짠돌이 경영이 숨은 공산이다. 두 형제의 무차입 경영이 이를 잘 말해준다.

무차입 경영이란 쉽게 말해 남의 돈으로 사업하지 않는 것으로, 안 회장이 어렸을 적부터 강조했던 짠돌이 교육과 일맥상통한다. 안 회장은 아무리 사업적 확신이 강하더라도 남의 돈을 빌려서 사업을 할 상황이면 욕심을 내지 않았다.

이러한 마인드, 즉 무차입경영은 사업을 확장시키지 못하고 투자의 흐름에도 장애가 된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기도 한다. 특히 기업가 정신과는 정면으로 위배된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이러한 비판은 사라졌다. 무차입 경영을 고집해온 기업인들은 대부분 외환위기 시절에 더 사세를 확정하는가 하면 흑자를 냈기 때문이다.

두 아들은 아버지의 무차입 경영을 그대로 계승했고, 이것은 곧 장인 정신이 투철하면서도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요인으로 작용했다.

에이스는 고객을 위한 ‘예술적이고 편안한 환경(Artistic Comfor table Environment)’에서 따온 말이다. 아버지는 평소 아들들에게 “최고가 아니면 만들지도 말라. 남의 비교 대상조차 되지 말라. 탁월한 1등이 돼라”고 강조했다.

안 회장 자신도 이를 위해 젊었을 때 해외출장을 가면 투숙한 호텔의 침대 매트리스를 칼로 뜯어 샘플을 가져오는 바람에 호텔에서 곤욕을 치른 일이 많았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엔 공장에 남아서 일하다가 12시가 다 돼서야 헐레벌떡 귀가하곤 했다.

1980년에는 국내 가구업체들이 납품하는 목물이 마음에 안 든다며 가구전문 ‘리오가구’를 설립하는 열의까지 보였다.

그의 아들들 역시 실무에 어두운 오너 2세들과는 달리 나이는 어리지만 대학 시절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매트리스 제작기술을 습득하는 등 이미 수준급 엔지니어라는 점도 직원들에게 신뢰를 얻는 요인이 됐다.

하지만 무엇보다 오래전부터 아버지의 손을 잡고 공장을 제집 드나들듯이 하면서 침대와 친해졌고, 커서는 공장에서 생산직 아르바이트 생활을 하면서 눈동냥 귀동냥을 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안 회장이 두 아들에게 물려준 건 날것 그대로의 살아있는 경험이었던 것이다.

[정리=이범희 기자] skycros@dailysun.co.kr
[자료제공:밀리언 하우스]

정리=이범희 기자 skycros@da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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