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배 세상만사 칼럼
이창배 세상만사 칼럼
  •  기자
  • 입력 2009-12-08 16:26
  • 승인 2009.12.08 16:26
  • 호수 815
  • 23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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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필귀정’이 목마르다
목줄을 하고 졸랑졸랑 따라가던 조그만 애완견이 걸음을 멈추었다. 한쪽 다리를 들더니 골동품 가게 앞에 서있는 12지신 석상에 빗대어 방뇨한다. 머리 희끗한 중년의 남자가 푸석한 얼굴로 표정 없이 기다리다가 목줄을 끌며 걸음을 옮긴다. ‘저런!’ 냅다 소리를 지르려다 겨우 참았다.

버스를 타든, 전철에 오르든 지긋한 나이에 백발인 필자 앞에서 청소년이나 젊은이들은 곧바로 자리를 양보한다. 당연시할 수도 있겠지만, 고맙다는 인사를 빠뜨리지 않는다. 지극히 기본적인 예(禮)라 하겠다. 하지만, 각박한 세상에 당연시하는 것은 만용일 것 같다.

조금만 유심히 주위를 살펴보면, 간과하기 쉬운 그 이면을 어렵잖게 접할 수 있다.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나이가 들어 보이면 서슴없이 일어나 자리를 양보하던 과거에 비해, 노약자 지정석이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버스나 전철에서 연배 차이가 두드러진 연장자를 보고도 자리를 양보하는 경우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반대의 경우로, 청소년들의 무거운 책가방을 받아주는 경우도 쉽게 볼 수 없다.

앳된 얼굴에 담배를 꼬나물고 뻐끔대도 못 본 척 고개를 돌리고 지나쳐야한다. 호통을 치며 뺨을 갈기던 일은 까마득한 옛날 일일 뿐, 지금 그랬다간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를 일이다. 젊은 남녀가 손잡고 가는 일이야 실로 아름다운 모습이라 하겠다. 그러나 남의 시선이야 아랑곳하지 않고 벌건 대낮인데도 껴안고 입맞춤하며 애정 표현을 하는 모습은 참으로 민망하고 낯설다.

지금 세종시 문제를 두고 여야가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다. 여야 내부가 이해관계에 얽혀 분열하고 있다.

지난 정권에서 여야가 합의 결정한 일로 수정 없이 원안대로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과 대선 승리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묵인했지만, 잘못된 경우라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주장이 터질 듯 팽팽하다.

국가 ‘백년대계’를 위한다며 격양된 목소리를 낮추지 않는 양편의 의견을 두고 어느 한 쪽을 두둔하고 싶지는 않다. 뻔히 아닌 줄 알면서 정권욕에 눈이 멀어 맞장구 친 당시의 여야 사람들 아닌가.

여야가 합의하고 국민이 선택한 안이라 변형 없이 세종시 건설을 진행해야 한다는 주장이나, 설사 그런 과정을 거쳤어도 내용에 중대한 하자가 있어 지금이라도 수정해야 한다는 필사에 가까운 주장의 대치가 안타깝기 짝이 없다. 교육의 부실한 기초와 기본 철학의 부재가 그 소이(所以)라 하겠다.

조선의 유학에서는 ‘소학(小學)’을 매우 중요시 했다.

조선은 개국 초기부터 소학을 향교·서원·서당 등 모든 유학 기관의 필수과목으로 정하고, 개인의 인격도야와 충효사상의 유교적 윤리관을 세우는 일에 유학 초보의 교범으로 삼았다.

이런 탄탄한 윤리적 교육의 바탕이 조선사회를 지탱하고 뼈대와 틀이 되었고, 추상같은 절개의 사육신, 생육신을 길러냈다. 국난의 위기 때마다 충신 용장이 줄을 이었으며, 민초에 이르기 까지 모든 백성에게는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리는 애국과 우국의 충성심이 있었다.

현실은 어떠한가. 무한의 가능성으로 열려 있는 우리의 아이들과 청소년들을 격물치지(格物致知)의 목표 설정은 차치하고, 눈앞의 목적을 위해 제도의 틀 속에 꽁꽁 묶어 두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말 음성을 귀로 익히기도 전에 영어를 들어야하고, 걸음마를 익히면서 학원이라는 울타리로 몰아넣는다. 맑은 인성을 일깨우고 가꾸기 위한 교육, 효와 충의 교육을 통한 전인교육과는 동떨어져 있는 현실이다.

나의 종교와 관계없이 보편적 인식과 예의 자세를 갖춘 인격이 중요하다. 교회나 성당 안에서 음주하거나 고성방가하면 아니 되는 것처럼 12지신 상에 방뇨하는 개를 방치해서도 아니 되는 것이다.

사랑의 종류나 행위에 따라 그 사랑이 고귀하기도 하고 순결하기도 한 게다.

하지만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지나친 표현의 행위는 저질스럽고 추하기 마련이다. 국가 백년대계를 책임져야 할 선량들이 일시적 정권욕에 눈이 멀어 아니어야 할 결정을 해놓고는 뒤늦게 되돌리려한다.

이 모든 것이 잘못된 교육 그리고 교육의 부재에 연원한다. 이것이든 저것이든 잘못된 일은 희생이 따르더라도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사필귀정’이어야 하고 ‘사필귀정’이 돼야한다. 이를 위해 효와 충이 기초된 전인교육이 이루어져야 함이다.


#이창배
한국도덕운동협회
대구광역시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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