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제약그룹 반세기의 동반자로 내조하다
유교 문화권에서 어머니의 이상형은 단연 맹자의 어머니 ‘맹모’를 꼽는다. 자식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한 것은 물론, 공부를 중도 포기한 아들에게 베틀의 실을 끊어 경계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렇다면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낸 기업인들의 어머니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어떻게 자녀들을 키웠기에 한국 최고의 CEO로 만들었을까. 다른 위대한 보통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는 어떻게 다를까. 최근 출간된<어머니의 힘>(한결 미디어 펴냄)은 이런 물음에 대해 해답을 제시한다. 이에 일요서울은 고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의 어머니 한성실 여사를 필두로 한국 최고 경영인을 길러낸 어머니들의 가르침을 연재중이다. 다음은 보령제약그룹 김은선 회장의 어머니 박민엽 여사 이야기다.박민엽 여사는 전후 혼란스럽던 시기에 1932년생 동갑내기 김승호(호는 중보, 보령제약그룹 회장)총각과 결혼하였다. 그때 (1956년)여사의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신랑 중보는 마음속에 이미 약국 간판을 걸어놓고 있었다. 약국경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에 차 있던 중보는 결혼 이듬해에 돈암동의 신혼집을 팔아 300만 환의 돈을 마련했다.
집을 판 돈으로 중보는 1957년 종로 5가에 11평 남짓한 점포를 얻었다. 그리고 그곳에 자신의 고향 이름을 딴 ‘보령약국’의 간판을 내걸었다. 하지만 중보는 약사는 아니었다. 약사도 아닌 중보가 가진 재산전부를 투자해 약국을 경영한다는 것은 긴장과 두려움을 수반하는 일이었다. 이런 중보에게 든든한 후원자는 바로 부인 박민엽 여사뿐이었다. 남편 중보는 왠지 모를 자신감에 넘쳤고, 아내 박 여사는 남편의 자신감을 믿어주었다.
종로 5가의 11평짜리 낡고 삐꺽대는 목조 건물에 엉성하게나마 가게를 꾸린 중보는 몇 가지 약품을 들여다 진열하였다. 준비를 끝낸 개업 전날, 신랑과 신부는 말없이 저녁을 들었다. 그리고 밤새 잠을 못 이루었다.
1957년 10월 1일, 이렇게 해서 보령약국은 문을 열게 되었다. 신랑 중부와 신부 박 여사는 어설프지만 진지하게 그리고 정성을 다해 막걸리 한 주전자로 개업식 고사도 치렀다.
헌신적인 사업 파트너 ‘톡톡’
개업 초기 불안해하던 남편의 마음에 헌신적인 박 여사의 내조는 언제나 큰 용기가 되었다. 부부는 함께 땀 흘려가며 창업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보령제약의 창업동지요, 동업자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박 여사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
사장 김승호는 아직 어린 나이였다. 그러니 처음으로 도전해본 창업의 길이 얼마나 두렵고, 서투르고, 설레였겠는가. 이 어려운 일을 누군가가 함께해준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생겨났을 것이다. 이런 창업의 길에 아내 박민엽이 어떤 어려움도 함께해줄 동지가 되어준 것이다.
정말 믿을 수 있는 박민엽이라는 든든한 종지가 곁에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김승호 사장은 모든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당시의 약품 판매는 도매상들이 독점하다시피했다. 소매상으로 이들과 경쟁해야 하는 보령약국의 환경은 그만큼 어려울 수 밖에 없었다. 남편은 근처 약국들보다 앞서 문을 열었고 제일 늦게 문을 닫았다. 박 여사도 항상 밤늦게까지 약국 일을 돕다가 갓낳은 어린 딸 은선을 등에 업고 빈그룻을 머리에 인채 집으로 향했다. 이런 생활은 몇 해 동안 계속되었다.
이렇게 열심인 아내에게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해, 전 재산을 투자한 보령약국이 하루 빨리 기반을 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중보는 밤늦도록 일에 매진했다.
서른한 살 때, 남편 중보는 동영제약을 인수했다. 조그만 약국을 개업한 지 6년 만에 제약업과 첫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제약회사라고는 하지만 50여 평 정도되는 집 안에다 어설프게 공장을 짓고 설비를 들여와 설치한 기초 수준의 회사다. 좁은 공간에 미비한 시설이었지만 남편은 누구보다 기뻐했다. 이러저런 기계는 모두 중보가 직접 조립한 것들이었다. 너무 수종해 중보는 닦고 또 닦았다. 제약업 시작 초기, 박 여사에게는 사생활이란 게 아예 없었다. 둘째딸을 등에 업은 채 큰 딸의 응석을 받아주어야 하고, 공장 직원들고 부대끼며 온갖 궂은일을 처리하는 것이 박 여사의 몫이엇다. 큰딸 은선은 이제 막 유치원 들어갈 나이에 마당 놀이터를 빼앗긴 셈이었다. 하지만 기계 돌아가는 것을 구경하고 종업원 아저씨들과 어울려 놀기도 하며 여섯 살배기 꼬마는 그렇게 보령과의 인연을 쌓아갔다.
어린시절부터 보령제약이 김은선 회장의 삶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던 셈이다. 보령의 50년 역사는 중보 회장에게 창업의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고, 동업자이자 아내이자 궂은일을 도맡은 동반자인 박여사의 손길이 곳곳에 배어 있다 뿐만아니라 보령제약이 발전을 거듭하는 시간마다 또는 어려움이 닥치거나 중대한 결정을 하게 되는 순간에는 늘 박 여사는 김승호 회장 곁에 있었다. 보령이 한국 제약업계의 보루로 성장하기까지 묵묵히 내조하고 지원을 다해온 박민엽 여사가 아니던가. 그런 박민엽 여사이기에 쏟아지는 박수소리가 오랜 인고의 세월을 뚫고 비상하는 보령의 우렁찬 함성으로 들렸다.
어느덧 장성한 큰 딸 은선이 아버지 곁에서 보령 가족을 꾸려 나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 또한 박 여사에게는 즐거움이었다.
이런 즐거움 속에서 박 여사는 남편과 함께 나란히 회갑연을 치르기도 했다.
박 여사는 슬하에 네 딸을 두었다. 보령제약그룹에서는 큰 딸 은선과 넷째딸 은정(보령메디앙스 부회장)이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국내 재계에서는 보기 드물게 여성 후계체제를 갖춘 셈이다.
중보 회장은 아내 박 여사가 몸져눕자 1년여 동안 수발을 도맡았다. 그러나 박 여사는 결혼 50주년이 되는 2006년 11월, 사랑하는 남편 중보 회장과 네 딸 등 가족의 곁을 떠났다. 남편을 도와 회사를 창업한지 50주년이 되는 날을 맞이하기 두 달 전의 일이다. 그동안 보령에 몸담았던 많은 보령 가족이 영결식을 찾아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올렸다. 업계의 원로 경영인부터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박 여사의 빈소를 찾아 명복을 빌었다. 박 여사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장지까지 동행한 귀빈들만 해도 100여명에 이르렀다. 박 여사의 가는 길을 위로하듯 기승을 부리던 겨울 날씨도 이날만큼은 따뜻했다.
남편 김승호 회장은 매달 두 번 평택에 있는 박 여사의 묘소를 찾아 보령의 발전하는 모습을 이야기해준다.
김은선 회장은 보령제약그룹의 중장기 계획과 미래 인재 양성을 위한 과감한 교육 투자 등 혁신과 인재 교육에 힘을 쏟고 있다. 후계자 김은선 회징이 이렇게 보령의 50년을 넘어 100년을 향해 열정적으로 일하는 모습을 박 여사도 지켜보고 있다.
[정리=이범희 기자] skycros@dailysun.co.kr
[자료제공:한결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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