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카리스마로 SKC 창업 내조

유교 문화권에서 어머니의 이상형은 단연 맹자의 어머니 ‘맹모’를 꼽는다. 자식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한 것은 물론, 공부를 중도 포기한 아들에게 베틀의 실을 끊어 경계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렇다면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낸 기업인들의 어머니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어떻게 자녀들을 키웠기에 한국 최고의 CEO로 만들었을까. 다른 위대한 보통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는 어떻게 다를까. 최근 출간된 <어머니의 힘>(한결 미디어 펴냄)은 이런 물음에 대해 답을 제시한다. 이에 <일요서울>은 고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의 어머니 한성실 여사를 필두로 한국 최고 경영인을 길러낸 어머니들의 가르침을 연재중이다. 다음은 SKC 최신원 회장의 어머니 노순애 여사의 이야기다.
경기도 용인 송전 저수지 근처 중벗뜰 마을 교하 노씨댁 규수 노순애는 1949년 4월, 스물넷의 최종건(SK그룹 창업회장) 청년과 혼인했다.
1949년 봄, 최종건의 아버지 최학배 공은 큰아들 종건과 큰 딸 종분을 한자리에 앉혀놓고 이렇게 말했다.
“종건아, 너도 이제 장가들 나이가 되지 않았니? 네 둘째누이가 마침 참한 색시를 봐두었다고 하니, 그리 알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거라”
그 무렵 최종건의 큰 누이 양분은 동생 최종현(SK그룹 전 회장)의 가정교사였던 표현구와 혼인했고, 둘째누이 양순은 용인군 송전으로 출가한 상태였다. 용인으로 출가한 바로 그 둘째누이가 아버지에게 동생의 신붓감을 소개해 올린 것이다.
“양순이가 종건이 색싯감을 봐두었다니, 큰 애 네가 가서 만나보고 왔으면 좋겠다”
최학배 공은 큰딸에게 최종건의 색싯감을 선보는 일을 맡겼다. 이에 최양분은 동생 양순이 사는 증벗뜰 마을을 찾아갔다.
노순애 규수를 만나본 최양분은 색싯감의 조용하고 얌전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색싯감은 시골 인심을 느끼게 하는 넉넉함도 겸비하고 있었다. 맏며느리 감으로 아주 훌륭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양순이가 이야기한 대로 아주 참한 규수이던데요. 종건이 색싯감으로 안성맞춤이에요”
색싯감을 만나보고 집으로 돌아온 최양분은 아버지께 이렇게 말씀 드렸다.
“그럼 됐다.”
아버지는 딸의 판단을 믿었다. 당사자인 최종건도 별다른 이의 없이 누이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의견이 모아지자 혼사는 서둘러 추진되었다. 최종건과 노순애의 혼인은 이렇듯 최양분·최양순 두 누이의 역할이 컷다.
나이 스물두 살의 노순애 신부는 4남4녀를 둔 종손 집안의 맏며느리가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대가족의 맏며느리는 만만치 않은 자리이다. 노 여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결혼과 동시에 100마지기에 이르는 농사일을 돌보는 등 집안의 크고 작은 일 모두가 신부 노순애의 손끝을 거치게 되었다. 집안일 때문에 남편의 사업에 혹시 지장이 있지 않을까, 신부 노순애에겐 큰 걱정거리였다. 그래서 남편이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게끔 집안단속에 공을 들였다. 노 여사는 말수가 적은데다 성격조차 조용하고 얌전했다. 어려움이 있어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나서는 것조차 꺼려하고, 속으로만 삭였다. 이렇듯 항상 자신보다는 가족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며 최선의 내조를 다했다.
조용한 내조, 큰 힘 얻어
신랑 최종건은 결혼 후,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는 기분이 들었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느끼게 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찾게 된 것이다. 그동안 다니던 회사를 관두고 다른 일에 열중했다. 신랑은 새벽녘에야 집으로 들어오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것도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였다. 이때 부모님의 새벽잠을 깨우지 않으려고 담을 넘어 들어와 신부를 놀라게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신랑은 공장의 콘크리트 바닥에 야전침대를 펴놓고 잠을 잤는데, 그 건장한 체구를 견디지 못하고 그만 망가지고 말았다. 그러자 신한은 아예 거적을 깔고 자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달 가까이 공장에서 먹고 자기도 하며 사업에 온갖 열정을 쏟아 부었다. 최 회장은 워낙 사람을 좋아해서 가족들의 야외 나들이에도 친인척이나 주변 사람을 초대하곤 했다. 그러나 최 회장은 1973년 한창 나이인 48세에 폐암 선고를 받았다. 1973년은 최종건 회장이 선경직물을 창업한 지 2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했다.
최종건 회장은 건강 상태가 안 좋고 체중이 갑자기 줄어들자 예전에 위궤양 수술을 집도한 적이 있는 서울대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결과는 폐암이 확실했다. 완치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병중에도 최종건 회장은 석유 사업을 챙기는 등 일에 열중했다. 그러나 이미 6개월의 시한부 선고를 받은 상태였다. 남편 최종건 회장에게 침투한 병마는 노 여사의 지극한 정성으로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해 1973년 9월 중순, 최종건 회장은 주치의의 권유로 서울대 병원에 입원했다. 병원에서도 회사 일을 챙기던 최종건 회장은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그해 11월 15일 유명을 달리했다.
남편 최종건 회장이 떠나자 노 여사는 그 충격으로 근육마비 증세를 일으켰다. 이 때 일으킨 근육마비 증세는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완치가 되지 않았다. 아마도 남편을 보낸 충격이 그만큼 컸던 탓일 것이다.
노 여사는 보살계까지 받은 신실한 불교 신도이다. 아버지의 명복을 기도하는 어머니의 정성은 자식들 눈에도 지극하기만 했다. 그 모습이 마치 어머니 아버지가 생전에 못 다한 말씀을 나누는 것 같았다. 불공에 쏟는 노 여사의 정성은 이승과 저승을 잇는 가교나 마찬가지였다. 노 여사는 몇 해 전, 큰 아들마저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야 했다. 가슴속에는 한이 첩첩이 쌓였을 테지만 이것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지극한 신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떠난 남편을 생각하면 노 여사의 마음은 아프기 이를 데 없었다. 1973년,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 원망스러운 생각이 왜 아니 들었을까. 당시 큰아들 윤원(전 SK케미칼 회장)이 스물셋이고, 막내가 아홉 살이었다.
‘이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하며 노 여사는 눈물도 많이 흘렸다. 다행히 큰 아들 윤원과 둘째 신원이 동생들을 잘 보살펴주었기에, 노 여사도 자식들을 의지 삼아 슬픔을 견딜 수 있었다.
3남 4녀를 결혼시킬 때마다 노 여사는 기쁜 한편, 남편이 곁에 없다는 애틋함에 마음이 시렸다. 남편의 30주기에 자식들은 ‘아버지의 평전’을 내고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또 아버지의 호를 딴 담연장학재단도 설립했고, 어머니 노 여사를 이 장학재단의 이사장으로 모셨다. 노 여사는 감사하며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노 여사는 진정 집안이 화목하기만을 간구한다. 자식들 사이의 화목과 가족 전체의 화합이 노 여사가 바라는 모든 것이다.
“난 다른 것은 필요 없어요. 우리 집안의 친형제나 사촌 형제간의 화목하기만을 바랄뿐입니다. 이것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전부입니다”
[정리=이범희 기자] skycros@dailysun.co.kr
[자료제공:한결미디어]
정리=이범희 기자 skycros@da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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