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회장 어머니의 자식교육법 전격 공개 제 17탄- 최태원 회장 편
재벌회장 어머니의 자식교육법 전격 공개 제 17탄- 최태원 회장 편
  • 정리=이범희 기자
  • 입력 2009-09-22 11:46
  • 승인 2009.09.22 11:46
  • 호수 804
  • 25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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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 낮추고, 배려 통해 SK성장 이룩”

유교 문화권에서 어머니의 이상형은 단연 맹자의 어머니 ‘맹모’를 꼽는다. 자식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한 것은 물론, 공부를 중도 포기한 아들에게 베틀의 실을 끊어 경계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렇다면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낸 기업인들의 어머니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어떻게 자녀들을 키웠기에 한국 최고의 CEO로 만들었을까. 다른 위대한 보통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는 어떻게 다를까. 최근 출간된 <어머니의 힘>(한결 미디어 펴냄)은 이런 물음에 대해 해답을 제시한다. 이에 일요서울은 고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의 어머니 한성실 여사를 필두로 한국 최고 경영인을 길러낸 어머니들의 가르침을 연재하고 있다. 다음은 SK그룹 최태원 회장의 어머니 박계희 여사편이다.

“정말이지, 남편만을 묵묵히 내조했던 전형적인 한국 여성이었다. 재벌 회장의 부인답지 않게 음식과 빨래도 직접 했다. 집안 가구도 꼭 필요한 것만 장만할 정도로 소탈했다. 또한 시장에 가서 손자, 손녀 간식거리까지 손수 챙길 정도로 부지런했다. 옷은 주로 이태원에서 싼 것을 사 입고, 자신을 치장하는 등의 사치를 멀리하며 살았다. 화사한 색채를 좋아했을 뿐 언제나 검소한 옷차림이었다. 자신의 의사를 밖으로 잘 드러내지 않아 내성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강단 있는 여성이었다.” 박계희(朴桂姬) 여사를 보아온 주변 분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다. 박계희 여사는 서울에서 1935년 7월 17일, 해운공사 이사장이던 아버지 박경식(朴慶植) 공과 어머니 안차수(安次洙) 여사 사이에서 넷째 딸로 태어났다. 1954년, 경기여고를 졸업한 뒤 당시로서는 아주 드물게 여자 몸으로 혼자서 미국 유학을 떠났다. 시카고 미술대학에서 응용미술을 공부할 무렵, 박계희 학생은 시카고 대학교 학생이던 ‘첫인상이 축구선수 같은’ 최종현 총각을 만났다. 인터내셔널 하우스라는 기숙사에서 지내던 박계희 학생은 1958년 최종현 학생과 처음으로 대면할 기회를 가졌다. 최종현 학생의 친구인 이곳 유학생의 소개로 이루어진 인연이었다. 평소 무뚝뚝하기만 하던 최종현 학생은 박계희 학생에게 첫눈에 반해버렸다. 박계희 학생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1년쯤 후 두 사람은 부부의 연을 맺었다. 결혼식은 침례교회 목사님의 주례로 거행되었다. 신혼살림은 학교 근처의 조그만 아파트에서 시작되었다. 신랑신부 모두 학생인지라 순번을 정해 밥을 짓고 함께 공부했다. 그러나 아이를 갖게 되자 박 여사는 학업을 중단했다. 아이와 남편의 뒷바라지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1962년 10월 말, 남편 최종현 회장은 박 여사와 아들 태원을 남겨두고 혼자 귀국길에 올랐다. 아버지의 부음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형님(최종건 선경그룹 창업회장)의 사업을 돕기 위해서였다. 곧이어 박 여사도 귀국길에 올랐다.


자유로운 삶 속에 절제된 환경 만들어

부부는 아이들이 자기 의지와 능력대로 잘 자라게 뒤에서 보살펴주는 역할만 하는 것으로 교육 방침을 정했다. 철저하게 자율을 강조한 셈이다. 간혹 아이들이 공부에 소홀다고 느껴지면 어머니인 박 여사는 이따금 잔소리를 했지만 아버지 최 회장은 자유방임 그 자체였다. 부모가 올바르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야말로 자식을 키우는 최상의 교육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박 여사는 외출도 자주하지 않는 조용한 성품이었다. 항상 주변 사람들을 편안하게 대했고, 가녀린 인상에다 말소리도 작은 편이었다. 성격은 꼼꼼하고 이따금 유머 있는 농담을 즐기기도 했다.

부부는 1962년 미국에서 귀국한 이후 10여 년 동안 살던 서교동 집을 빼놓고는 자신들 소유의 집을 갖지 않았다. 아이들이 크면서 서교동 집은 비좁게 느껴졌다. 새로운 집을 구하러 다녀봤으나 마땅한 곳이 그다지 없었다. 그래서 임시로 눌러 앉은 것이 워커힐 빌라였다. 그 뒤로 두 분은 워커힐 빌라에서 전세로 살며 당신들의 말년까지 보내게 되었다. 워커힐 빌라가 남편 최 회장 회사의 소유였으니, 자기 집을 전세 내 살았던 셈이다. 박계희 여사는 40대 초반 때, 남편의 권유로 몇 개월간 동양사 공부를 했고 서예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서예에 대한 관심은 자연히 한문 공부로 이어져 한학의 대가 임창순 선생에게 몇 년 동안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얼마 후, 박 여사의 주도로 미술관을 만들었고, 직접 관장으로 취임해 운영을 하기도 했다. 남들보다 두세 배의 노력으로 미술관을 성장시켰다.

이에 박 여사를 ‘사설 미술관의 개척자’로 평가한다. 또한 그룹 회장 직계 가족으로서는 처음으로 관장에 취임해 재벌 그룹들의 미술관 운영 시대를 선도하기도 했다.

박계희 여사는 당신께 아무리 중요한 일이 있더라도 남편의 뒷바라지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1997년 6월, 저세상으로 가는 순간까지도 남편 최종현 회장의 병간호를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박 여사는 남편 최 회장의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음식은 일체 입에 대지 않고 커피만 마시며 견뎠다. 1주일 가까이 잠은 물론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한 상태였으니 무척 피곤했으리라. 집도의로 부터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그동안의 긴장이 한꺼번에 풀렸다. 박 여사는 두 아들과 함께 병원 밖에서 식사를 마친 다음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그때까지는 이상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박 여사의 이승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밤새 조용히 영면에 든 것이다. 박 여사는 그렇게 성품 그대로 조용히 삶을 마쳤다. 박계희 여사에겐 꿈이 있었다. 동서양을 아우르는 폭넓은 지식을 가르쳐주는 학교, 장르를 초월해 새로운 창작 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가르쳐주는 학교, 박계희 여사는 그런 예술 학교를 만드는 게 꿈이었다. 그러나 박 여사는 자신이 꿈꾸던 이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이 세상을 떠났다. 언젠가 가족 모임에서 “죽은 뒤의 일까지 간섭하려는 것은 인간의 전형적 착각”이라고 했듯이 삶과 죽음의 이치를 꿰뚫은 듯 홀연히 이승을 떠났다. 평소 최종현 회장과 박계희 여사 두 분은 친한 사람들 앞에서조차 애정 표현을 삼갔다. 그러나 병상에서 박 여사의 죽음을 전해 들은 최종현 회장은 절친한 친구 홍사중을 붙잡고 울부짖었다. “난 이제 어떻게 사니….” 친구는 그때 처음 최 회장의 눈물을 보았다. 그것을 친구는 “창자가 찢어지는 듯 한 통곡”이었다고 표현했다. 그 자리에서는 두 아들과 딸(태원, 재원, 기원)이 몸부림치는 아버지를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한 남자의 아내로서, 아이들의 어머니로서 충실한 삶을 살다 간 박계희 여사. 모든 사람에게 해맑은 미소와 겸손으로 기억되는 박계희 여사. 그러나 박계희 여사의 삶은 목숨을 바쳐 사랑한 사람이 있었고, “창자가 찢어지는 듯한 통곡”으로 그 죽음을 애통해하는 사랑이 있었기에 더욱 빛나 보인다.

<정리=이범희 기자> skycros@dailysun.co.kr
[자료제공:한결미디어]

정리=이범희 기자 skycros@da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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