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가풍의 척도, 조용한 내조 속 허을수 여사의 힘

유교 문화권에서 어머니의 이상형은 단연 맹자의 어머니 ‘맹모’를 꼽는다. 자식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한 것은 물론, 공부를 중도 포기한 아들에게 베틀의 실을 끊어 경계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렇다면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낸 기업인들의 어머니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어떻게 자녀들을 키웠기에 한국 최고의 CEO로 만들었을까. 다른 위대한 보통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는 어떻게 다를까. 최근 출간된 (한결미디어 펴냄)은 이런 물음에 대해 해답을 제시한다. 이에 일요서울은 고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의 어머니 한성실 여사를 필두로 한국 최고 경영인을 길러낸 어머니들의 가르침을 연재할 예정이다. 다음은 LG그룹 구자경 명예회장의 어머니 허을수 여사의 이야기다
LG그룹 구자경(具滋暻) 명예회장의 어머니 허을수(許乙壽) 여사는 1905년 경남 진양의 김해 허씨 진사 만식(萬寔) 공의 맏딸로 태어났다. 열여섯 살 되던 해인 1920년, 이웃집에 사는 구인회(LG그룹의 전신인 럭키그룹 창업회장, 호는 연암, 아명은 정득, 1907∼1969) 총각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허을수 처자는 1905년생이니 정득 소년보다 두 살이 위였다.
신랑은 열네 살이었다. 어린 신랑은 자기보다 나이 많은 신부에게 함부로 말을 놓을 수가 없었다. 당시 풍속으론 결혼식을 올렸어도 신부는 일정 기간 친정에 머물러야 했다. 새색시가 보고 싶은 신랑은 어둠을 틈 타 이웃인 처가의 담을 넘어 신부를 찾아가곤 했다.
결혼 후, 신랑은 ‘정득’이라는 아명 대신 할아버지가 지어준 ‘인회(仁會)’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신랑 연암은 집안이 부유한 처가에서 학비를 부담해주는 조건으로 1924년 홀로 서울로 올라가 중앙고보에 입학했다. 대도시 서울은 연암에게 새로운 문물을 접할 수 있는 활기 넘치는 세상이었다.
집안 내조 ‘톡톡’
서울 생활이 제법 익숙해져갈 무렵, 장인어른이 갑자기 돌아가셨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연암의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귀향할 것을 권했다.
중앙고보 2학년을 마치고 연암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허 여사는 남편 연암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뒷바라지를 뜻대로 못해드려서 죄송해요.”
그러나 연암은 태연했다.
“내가 할 일은 내가 다 알아서 해나갈 수 있으니 임자는 걱정하지 마소.”
1925년 봄, 큰아들 자경(LG그룹 명예회장, 전 전경련 회장)이 태어났다. 자식을 둘씩이나 둔 부모가 된 21세의 허 여사와 19세의 연암 부부는 나이답지 않게 세상을 보는 눈이 성숙해져갔다. 큰아들 자경이 태어난 이후, 허 여사 내외는 슬하에 많은 자식을 얻었다.
허 여사는 당신의 아이들과 비슷한 연령대의 시동생들까지 동거하는 대가족을 꾸려가고 있었다. 게다가 맏며느리인지라 그 역할이 막중할 수밖에 없었다. 집안의 화목을 가꾸어가려면, 드러나지 않게 여러 가지로 마음씀씀이가 넓어야 했고 도량 깊게 행동해야만 했다.
허 여사는 시동생들의 뒷바라지에 성심성의를 다하였고, 훗날 그 시동생들은 남편의 사업을 있는 힘을 다해 돕게 되었다. 남편 연암의 사업에는 시동생들뿐만 아니라 친정인 허씨 일가도 동참해 힘을 보태주었다. 이처럼 허 여사와 연암의 혼인은 두 집안의 결속을 더욱 끈끈하게 이어줬을 뿐만 아니라 연암의 사업에 허 여사의 친정 집안이 참여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허 여사의 존재가 자연스레 그룹 결속의 중심점이 된 셈이다. 허 여사 이후에 구씨 가와 허씨 가는 무려 여덟 건의 겹사돈을 맺어 그 끈끈한 유대를 이어갔다.
구씨 집안의 3대 종부, 6형제 중의 맏며느리, 6남 4녀의 어머니로서 허 여사는 무척이나 근검한 삶을 꾸려나갔다. 몸에 밴 절약 정신과 철저한 물자 관리는 대를 이은 전통이기도 했다.
1942년 5월, 큰아들 자경을 장가보냈다. 허 여사가 서른여덟 살 되던 해였으니 며느리를 일찍 본 셈이다. 며느리는 단목골(대곡면 단목리)에 사는 하순봉 공의 큰딸 정임 처자로 열아홉 살이었다.
1967년, 허 여사 부부는 칼텍스 본사의 초청으로 미국 여행을 하게 되었다. 연암은 그동안의 아내의 헌신에 대한 고마움을 여행을 통해 표현하리라 마음먹었다. 허 여사는 처음엔 동행을 꺼렸지만 연암의 설득으로 동반 여행길에 올랐다.
칼텍스 사의 빈틈없는 준비와 아내를 사랑하는 연암의 지극한 마음까지 더해진 덕분에 여행은 만족스럽기 그지없었다. 이처럼 즐거운 여행에 막내딸(순자) 내외를 만나는 반가움까지 더해졌다. 더할 나위 없이 즐겁기만 한 여행이었다.
연암은 막내사위가 국내에 있을 때 골프를 가르쳐주면서 “내 막내사위요.” 하고 주변에 자랑할 정도로 무척이나 아꼈다. 그런 막내 내외의 안내를 받으며 미국 여행을 하게 됐으니 허 여사 부부는 정말 순간순간이 행복하기만 했다. 막내딸은 이때 첫아이(유희영)를 임신한 만삭의 몸이었다.
1968년, 시어머니 진양 하씨가 원서동 자택에서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연암 회장은 부의금과 조화를 일체 사절하고 장례 절차도 간소하게 거행했다. 문상객에게도 술 대신 홍차 한 잔을 대접하는 등 정중한 예는 갖추되 검소하게 하였다.
허 여사는 남편 연암이 치료만 계속하면 나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뇌관종양은 치료가 어려운 병이었다. 병원 측의 권유에 따라 가족은 조용하게 연암의 귀국을 준비했다.
집에 돌아온 연암은 아픔을 잊기라도 하려는 듯 열정적으로 일에 매달렸다. 허 여사를 비롯한 식구들은 연암 회장의 건강이 회복 단계에 접어든 것으로 생각하고 사뭇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연암의 병세는 어쩔 수 없었다. 1969년 12월 31일, 연암은 허 여사와 가족들 곁을 떠났다. 세수 63세였다.
지난 6월 호남정유 준공식 때 아내에게 한 약속을 잊었는지, 그해를 채 넘기지 못하고 허 여사 곁을 떠난 것이다.
1986년 6월 13일, 허 여사도 연암의 곁으로 떠났다. 이제 부부는 생전의 못 다한 약속을 지키려 평화로운 저 세상에서 다정스레 여행을 즐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정리=이범희 기자] skycros@dailysun.co.kr
[자료제공:한결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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