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제를 통한 마음가짐 대성그룹의 등불 되다

유교 문화권에서 어머니의 이상형은 단연 맹자의 어머니 ‘맹모’를 꼽는다. 자식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한 것은 물론, 공부를 중도 포기한 아들에게 베틀의 실을 끊어 경계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렇다면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낸 기업인들의 어머니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어떻게 자녀들을 키웠기에 한국 최고의 CEO로 만들었을까. 다른 위대한 보통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는 어떻게 다를까. 최근 출간된 (한결 미디어 펴냄)은 이런 물음에 대해 해답을 제시한다. 이에 일요서울은 고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의 어머니 한성실 여사를 필두로 한국 최고 경영인을 길러낸 어머니들의 가르침을 연재할 예정이다. 다음은 대성그룹 김영대 회장의 어머니 여귀옥 여사 편이다.
여귀옥 여사는 늘 자녀를 올바르게 키우기 위해서는 어머니의 절제하는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스스로 작은 것 하나를 살 때도 수십 번 생각하고, 옷 하나를 사면 유행에 관계없이 해질 때까지 입었다. 시간이 든 돈이든 여유가 생기면 이웃을 돌보는데 힘썼고 생활 속의 절제야말로 최선의 환경운동이라며 이를 실천하는 생활인이었다. 알뜰하게 살림하고 남을 도우며 살아가는 이런 어머니의 모습에서 자식들은 올바른 삶의 길을 터득해 나갔다.
여귀옥 여사는 1923년 5월 10일 대구에서 태어나, 신명여고와 평양여자신학교를 수료하였다. 여 여사의 어머니 최성연 여사와 김수근 회장의 어머니 기묘임 여사는 같은 교회에 다니는 신도였다. 이러한 양가 어머니의 인연이 김수근(대성그룹 창업회장 1926~2001)총각과 여귀옥 결혼으로 이뤄졌다.
어렵기만 하던 기묘임 여사의 집안 형편은 아들 수근이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부터 눈에 띄게 좋아지기 시작하였다. 이제 수근은 나이 23세의 어엿한 대장부였다. 이즈음 기 여사가 해결해야 할 첫 번째 문제는 아들 수근의 혼사였다. 기 여사는 예쁜 처녀만 보아도 예사로 넘기지 않았다. 비록 집안 형편이야 어려웠지만 며느릿감은 최고로 고를 작정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에서 참한 규수를 만났다. 한동네에 살고 있는 당시 신명여학교 3학년이던 여귀옥이라는 처자였다. 여귀옥 처자는 오빠가 여러 명 있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고명딸이었다. 부모는 교회 집사요, 권사였다. 부친 여용섭 공은 교회 일에 열심이던 장립집사였는데 수년 전에 별세했고 오빠 네 명이 모두 일본에 유학 중이었다. 오빠들을 전부 유학 보낼 정도로 부유한 집안이었던 것이다.
마침 도쿄에 유학중이던 여귀옥 처자의 큰 오빠 여규만이 방학을 맞아 집에 와 있었다. 오빠 여규만은 당사자인 김수근을 집으로 초대했다. 집으로 들어서는 김수근가 마주친 여귀옥 학생은 무의식중에 방긋 웃었다. 훗날 김수근 회장은 이때의 일을 회상하곤 했다.
김수근을 만나본 큰오빠 여규만은 마음이 흡족하였다. 김수근은 괜찮은 청년이라고 인정했던 것이다. 그리고 큰 오빠가 일본으로 가기 전에 목사님을 모시고 약혼식을 올리자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여귀옥 처자는 김수근 총각과 바로 약혼식을 하게 되었다.
같은 마을의 총각이던 약혼자 김수근은 이때부터 여귀옥 여학생의 집을 자주 드나들기 시작했다. 교회 일도 의논하고 책을 빌려보기 위함이었지만 무엇보다 여귀옥 학생을 만난다는 게 큰 즐거움이었다. 그러던 중 최성연 권사는 김수근을 유학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 권사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자신을 깨우쳐 준 것으로 받아들였다. 당연히 사윗감 김수근에 유학을 권했다. 이렇게 해서 김수근의 도쿄 생활이 시작됐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나 영양실조에 과로까지 겹쳐 ‘폐침운’이라는 병을 얻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도 최 권사는 당신 딸의 장래보다 한 가정의 앞날을 염려해서 얼른 대를 이어줄 생각만 했다.
이리하여 1941년 10월 이문주 목사의 주례로 혼례식이 치러졌다. 결혼 후 여귀옥 신부는 건강이 악화된 시어머니를 간병하기 위해 대구 집에 남고 신랑 김수근은 또 다시 혼자 일본으로 떠났다. 남편 김수근은 연탄 공장에 손을 댔다. 남편의 사업에 탄력이 붙을 무렵 여 여사가 새로운 제안을 했다. 공장 옆에다 칠판 공장을 차리자는 것. 남편의 회사는 아직 소규모라 사람들이 김수근을 금융조합시절의 직책 그대로 ‘이사’라고 호칭하던 때의 이야기다. 당시는 한국전쟁으로 학교가 불에 타거나 군에 징발당한 시절이라 칠판의 수요는 날로 급증했다. 인민군들이 칠판을 땔감으로 써버린 탓에 휴전 휴 각 급 학교에서 칠판을 구하느라 법석을 떨어야 했다. 학교 뿐 아니라 군대에서도 이동식 칠판의 수요가 일었다. 피난에서 돌아온 뒤 8개월간은 실로 칠판 제작에 매달린 기간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다 칠판은 현찰을 받는 장사였다. 그러니 칠판의 판매가 대성산업공사 초기의 효자 상품 역할을 톡톡히 해낸 셈이다. 이것을 기반으로 대성산업공사는 마침내 연탄 제작을 기계화하는데 성공했다.
자식 모두 ‘대성’, 회사명도 ‘대성’
김수근 회장과 여귀옥 여사는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다. 장남 영대(대성그룹 회장), 차남 영민(서울도시가스 명예회장), 3남 영훈(대구도시가스 회장), 장녀 영주(대성닷컴 부회장), 차녀 정주(대성닷컴 사장), 3녀 성주(성주그룹 회장)가 그들이다. 넷째 아들이 교통사고로 먼저 가족 곁을 떠난 것을 제외하곤 모두 훌륭하게 성장했다.
남편 김수근 회장의 생존해 있을 당시 슬하의 식구는 모두 37명이었다. 명절이나 생일날 식구가 함께 모일 땐 모처럼 돈암장이 시끌벅적 활기에 들뜨곤 했다. 소년 가장으로서 외롭게 가족을 부양하던 시련을 딛고 이제는 남부럽지 않는 대가족을 갖게 된 것이다.
여 여사의 3남 3녀는 모두 경영에 참여할 만큼 대외활동이 활발하다. 특히 다른 재벌가와 달리 딸들이 경영 참여가 두드러져 보인다. 딸들은 또한 절제의 미덕이 최선이라는 어머니의 뜻을 이어 ‘대한기독교여자절제회’를 통한 사회봉사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런 때문인지 대성에서는 사업의 중점 부문을 ‘효자 사업’이 아니라 ‘효녀사업’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만큼 여성의 재능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대성그룹의 ‘대성(大成)’이란 이름은 ‘대기만성’의 줄임말이다. 허세를 부리지 말고 차곡차곡 덕을 쌓는 경영을 하라는 뜻이다. 회사 이름도 여귀옥 여사가 지은 것이다. 지금은 자식들이 이 ‘대성’이란 명칭을 같이 사용하고 있다.
대성그룹의 정신적 지주였던 여귀옥 여사는 지난 2006년 3월 20일 84세를 일기로 사랑하는 가족 곁을 떠났다. 그러나 ‘대성’이라는 이름과 함께 올바른 자녀교육의 귀감이 되고있다.
[정리=이범희 기자] skycros@dailysun.co.kr
[자료제공:한결미디어]
정리=이범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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