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이 도전 할 수 있는 초석 마련 ‘노력’

유교 문화권에서 어머니의 이상형은 단연 맹자의 어머니 ‘맹모’를 꼽는다. 자식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한 것은 물론, 공부를 중도 포기한 아들에게 베틀의 실을 끊어 경계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렇다면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낸 기업인들의 어머니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어떻게 자녀들을 키웠기에 한국 최고의 CEO로 만들었을까. 다른 위대한 보통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는 어떻게 다를까. 최근 출간된 (한결미디어 펴냄)은 이런 물음에 대해 해답을 제시한다. 이에 일요서울은 고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의 어머니 한성실 여사를 필두로 한국 최고 경영인을 길러낸 어머니들의 가르침을 연재할 예정이다. 다음은 강신호 동아제약 회장의 어머니 김을순 여사의 이야기다.
동아제약 강신호 회장의 어머니 광산 김 씨 을순여사의 고향은 경북 상주의 외서면 대전리이다. 대전리에서 30여리 떨어진 은척면 무능리에 사는 동호 강중희(동아제약 창업회장)총각과 혼인 말이 오간지 두 달 만에 혼례를 올렸다.
당시 동호는 서당에 다니는 학동이었다. 서당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동호에게 어느 날 집으로 빨리 오라는 연락이 왔다. 집에 도착해서는 까닭을 물어볼 겨를도 없이 새 옷으로 갈아입고 한마을에 사는 삼촌댁으로 향했다. 삼촌 집에서는 낯선 손님 셋이 동호총각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부 쪽에서 선을 보러 온 사람들이었다.
그 자리에서 동호 총각은 말하자면, 허혼의 합격점을 받은 셈이다. 그리고 열 입골 살 신부와 열다섯 살 신랑의 혼례는 1922년 음력 섣달 길일을 택해 치러졌다.
신랑 동호의 마음속에는 항상 새로운 세계를 향한 꿈이 자리 잡고 있었다.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 그곳에서 생활하고 싶은 꿈이었다. 그러나 결혼까지 한 가장으로서 집안을 돌보지 않고 혼자 떠나기는 어렵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망설이는 남편에게 신부는 넓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도록 독려하고 권유했다. 김을순 신부는 그만큼 사료가 깊었다.
“당신이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요. 대장부가 의지를 꺾어서야 되겠어요? 큰일에는 적극적인 태도로 임해야 하는 법이에요. 사내대장부가 이런 시골에서 매일 똑같은 일만 되풀이해서 되겠어요? 집안 걱정은 하지 마세요. 살림이야 어찌되었든 제가 꾸려 나갈 테니 당신은 걱정 말고, 하시고 싶은 일을 해 보세요. 서울이든 일본이든 당신 가고 싶은 곳으로 나가보세요. 거기서 하고 싶은 일도 하고 견문도 넓히고 마음껏 꿈을 펼쳐보세요”
아내의 격려에 용기를 얻은 동호는 형님의 돈 50원을 몰래 꺼내 일본행을 택했다. 이때 동호의 나이 열여덟, 1925년 7월의 일이었다. 막상 일본에 도착해보니 그곳의 사정은 어수선하기만 했다. 일본어도 서투르고 특별한 기술도 없는 조선의 시골 청년이 차지할 자리가 쉽게 구해질 리도 없었다. 일하면서 돈도 벌고 공부도 하겠다는 꿈을 실현하기에는 너무 힘이 들었다. 그러던 중 ‘부친 사망’이라는 비보를 접했다. 서둘러 고향으로 돌아왔다. 개화의 물결을 체험하고 온 탓일까. 시골에서의 생활에 동호는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말수도 적어졌다. 가장 활기찬 시기여야 할 청년이 날이 갈수록 오히려 위축되어가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남편의 가슴에 다시 대처로 나가고 싶은 꿈이 꿈틀대고 있음을 김 여사는 직감했다. 김 여사는 남편에게 친정 식구들이 살고 있는 나고야의 주소를 적어주면서 말했다.
“단시일에 성공하다는 것은 힘든 일 아닙니까? 그러지 말고 다시 한 번 도전해 보세요. 도시에서의 생활이 아무래도 시골에 묻혀 사는 것보다는 안 낫겠어요?”
이리하여 동호는 다시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동호는 나고야 행 기차표를 들고 짐을 꾸렸다.
7개월간의 일본 나고야 생활을 통해 ‘부지런하면 살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용기를 얻은 동호는 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내와 아들, 어머니를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그는 주저앉고 말았다. 이때 또 다시 김 여사가 힘을 실어주었다.
김 여사는 고향에서 전망 없이 세월을 보내는 남편의 이런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김 여사의 권고는 약해진 동호의 마음을 움직이는 활력소가 되었다. 동호는 세 번째 출향을 준비했다. 동호는 서울에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발품을 팔던 중 ‘동양제약 외판 사원 모집’ 벽보를 보았다. 마침내 스물세 살 동호 청년의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이다.
1933년 동호는 가족과 함께 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그리고 가족들을 서울로 올라오라고 했다. 시골 생활을 뒤로하고 김을순 여사는 아이들과 조카 신오를 데리고 서울로 향했다. 남편의 사업이 도매업으로 자리를 잡을 때까지 위생 재료의 소분 포장 작업은 김 여사 몫이었다. 소분하는 일은 전문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 단순 작업이기도 했다 . 이윽고 동호 사장의 약방은 활기를 띠어가기 시작했다. 일손이 모자라 고향에 있는 식구들의 힘을 빌리기도 했다. 사업은 승승장구 했다.
하지만 아들 강신호 회장이 초등학교 5학년 때, 김을순 여사는 식도위에 병을 얻었다. 어려운 살림에 그렇게 병으로 고생하면서도 자식에 대한 애정을 각별했다. 아픈 몸에도 하루 빠지지 않고 자식들을 위해 부엌을 오간 것은 물론이다.
짧은 생이지만 사랑 표현 ‘듬뿍’
그러나 1940년 9월, 김 여사는 1년간의 투병 끝에 3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주위의 지극한 간병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효험 없이 너무나도 일찍 사랑하는 식구들을 등진 것이다. 아들 신호가 중학교 1년 때의 일이었다. 남편 동호는 청년 시절 자신을 바깥세상과 접하도록 자극과 격려를 아끼지 않던 아내의 모습을 떠올리며 통곡했다. 남편의 꿈을 위해 헌신하고, 오직 내조에만 열중한 아내였다. 재산도 어느 정도 모으고 여유를 갖기 시작했는데 이렇듯 아내가 허무하게 떠나니 동호의 고통은 헤아릴 수 없었다. 남편의 성공을 기원하며 몇 번이고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게 용기를 주었던 아내 김을순 이었다. 땀 흘려 소분작업을 하면서도 즐거워하고, 단칸 셋방에서 기거해야 했던 어려운 시절을 잘도 견뎌준 아내였기에 동호의 마음은 더욱더 아리기만 했다.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아픔을 강신호 회장은 이렇게 표현한다.
“어머니가 오래 사셨더라면 효자 노릇을 했을 텐데....자식을 위해서라도 부모님은 오래 살아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정리=이범희 기자] skycros@dailysun.co.kr
[자료제공:한결미디어]
정리=이범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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