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극적인 성격으로 도전… 경영 성과 달성해

유교 문화권에서 어머니의 이상형은 단연 맹자의 어머니 ‘맹모’를 꼽는다. 자식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한 것은 물론, 공부를 중도 포기한 아들에게 베틀의 실을 끊어 경계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렇다면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낸 기업인들의 어머니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어떻게 자녀들을 키웠기에 한국 최고의 CEO로 만들었을까. 다른 위대한 보통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는 어떻게 다를까. 최근 출간된 (한결 미디어 펴냄)은 이런 물음에 대해 해답을 제시한다. 이에 일요서울은 고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의 어머니 한성실 여사를 필두로 이번호에는 애경그룹 채형석 부회장의 어머니 장영신 회장의 이야기를 알아본다.
애경그룹 채형석(蔡亨碩) 부회장의 어머니 장영신(張英信) 회장은 잘 알려진 대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여성 경영인이다. 경영자의 아내였고, 경영자를 길러낸 어머니이자, 현직 애경그룹의 총수이다.
장영신 회장은 1936년 7월 서울 명륜동에서 아버지 장희근 공과 어머니 문금조 여사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때에는 전국 규모 대회에서 상을 자주 받을 정도로 노래를 잘 불렀다. 타고난 건강 체질인 데다 학업 성적도 우수했다.
1959년 6월, 스물네 살 되던 해에 장영신은 애경유지공업 창업주인 채몽인과 신당동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신랑 채몽인은 어머니 친구의 아들인 데다 이웃에 살아 평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그러나 1970년 7월, 남편 채 사장이 심장마비로 가족 곁을 떠났다. 결혼하고 11년, 막내아들이 태어난 지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장영신은 그 슬픔을 극복해내기로 마음을 다졌다.
장영신은 엄마를 안쓰러워하는 아들의 마음이 너무나 대견스러웠다. 이런 아들을 끌어안고 울며 장영신은 강한 엄마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남편이 경영하던 회사도 건실하게 성장시키겠다는 마음의 다짐을 했다. 장영신 회장의 경영 인생은 이렇게 개척과 도전과 모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남편의 소상(小祥)을 치른 후, 미망인 장영신은 회사 경영에 본격 참여하리라 마음먹었다. 그 준비 단계로 먼저 경리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여자 수강생은 장영신 혼자였다.
경영에 필요한 재무제표니 손익계산서 등의 기본적인 내용을 익히고 나서 장영신은 회사 경영에 나서겠다고 발표했다.
1972년 8월 1일, 전업주부 장영신은 애경의 신임 대표이사 사장으로 변신했다. 사장이던 오빠를 비롯한 임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선택한 길이었다. 함께 일하며 최소한 기본이라도 가르쳐달라는 장영신의 간곡한 부탁을 외면한 채 오빠와 임원들은 애경을 떠났다.
사업 초기, 장영신 회장은 밤에 잠을 자기 전 ‘이대로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사업의 길은 그만큼 어려움이 많았다.
사장 장영신은 미래 애경의 사업 중심을 화학 분야로 설정했다. 단순한 비누 제조업보다는 앞으로 화학이 가능성 있는 분야가 될 것이 확실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에 장영신 사장은 원가 절감, 안전 관리, 품질 관리, 설비 투자 확대에 중점을 둔 공격적 경영을 선언했다. 그리고 숱한 고비를 넘기며 다음 해인 1973년에는 최대의 매출을 달성하는 경영 성과를 이룩하였다. 이는 장영신 회장이 적극적인 성격으로 도전을 즐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장영신 회장은 큰아들 채형석이 미국 유학에서 돌아오자마자 생산부 사원으로 발령을 내어 5개월 동안 생산 현장을 체험하게 했다. 이어 8개월간 애경산업 영업부에서 영업을 경험하도록 했다. 1986년부터 1987년 여름까지 1년 6개월 동안은 애경산업 마케팅 부서의 업무를 담당시켰다.
이처럼 큰아들 형석은 1987년까지 각 부서를 돌며 스스로 여러 부문의 업무를 익히는 경영 교육을 받았다. 회장의 아들이 아니라 경영자로서의 자질이 있는지를 검증하기 위함이었다. 1993년 9월에는 공장을 이전하고, 창고로 쓰던 땅에 애경백화점을 세웠다. 장남이 대표이사로, 차남이 이사로 취임했다. 애경산업이 유통업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여는 첫 작품이기도 했다.
장영신 회장은 주부로서도 소홀함이 없도록 집안일에 정성을 쏟았다. 편한 옷차림에 모자를 쓰고 집 안 정원의 풀을 뽑고 있노라면 “주인아주머니 계시느냐?”는 방문객의 질문을 받기도 했다. 방문객 입장에서는 행색이나 하는 일로 보아 파출부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기업가이기 이전에 주부로도 맹위 ‘떨쳐’
장영신 회장은 아무리 바빠도 빨래만은 직접 자신의 손으로 해왔다. 소비자 입장에서, 주부의 입장에서 애경의 제품을 냉정하게 평가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매번 다른 세제와 다른 비누를 사용하며 제품을 평가했다. 아마도 장영신 회장만큼 다양한 종류의 세제를 사용해본 주부는 없을 것이다. 이는 자신이 좋다고 인정할 수 있는 제품이어야만 정말 자신 있게 소비자에게 권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소비자를 위하고, 소비자에게 필요한 제품을 개발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장영신 회장은 대외 활동에도 열성적이다. 여성 경영자로서는 처음으로 ‘재계의 본산’이라는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1999년)의 일원이 되었고, 국가에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정치(국회의원)에 몸담기도 했다. 1999년 7월에는 한국여성경제인협회의 회장을 맡기도 했고, 대한상의 상임위원, 중기청 중소기업특별위원회 위원, 무역협회 부회장 등 여러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장영신 회장은 여성에 대한 편견이 특별한 우리나라에서, 주부에서 경영인으로 변신했고, 중소기업 규모의 애경을 대기업 애경그룹으로 발전시켰다. 그래서 CEO 장영신의 성공은 더욱 특출 나 보인다.
[정리=이범희 기자] skycros@dailysun.co.kr
[자료제공:한결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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