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봉사와 자녀교육에 헌신”

유교 문화권에서 어머니의 이상형은 단연 맹자의 어머니 ‘맹모’를 꼽는다. 자식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한 것은 물론, 공부를 중도 포기한 아들에게 베틀의 실을 끊어 경계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렇다면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낸 기업인들의 어머니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어떻게 자녀들을 키웠기에 한국 최고의 CEO로 만들었을까. 다른 위대한 보통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는 어떻게 다를까. 최근 출간된 (한결 미디어 펴냄)은 이런 물음에 대해 해답을 제시한다. 이에 일요서울은 고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의 어머니 한성실 여사를 필두로 동양그룹 이혜경(동양그룹 고문), 이화경(오리온그룹) 사장의 어머니 이관희 여사의 이야기다.
이관희(李寬姬) 여사는 함흥이 고향이다. 영생고등여학교를 졸업한 뒤 교편을 잡고 있던 이관희 처자가 이양구(호는 서남, 전 동양그룹 회장, 1916∼1989) 총각을 만난 것은 1950년 전쟁의 포연 속에서였다.
서남은 어머니 친구의 아들이었다. 그러니까 둘의 만남이 친구 사이인 양가의 어머니를 사돈으로 맺어준 셈이다.
약혼 당시 이양구 회장은 서른넷, 이 여사는 스물둘의 나이였다. 총각 이양구는 이관희 규수를 처음 본 순간 정숙하고 순진하면서도 맑은 아름다움에 빠졌다. 한마디로 노총각 서남이 미모의 처자에게 마음을 쏙 빼앗긴 것이다. 이관희 처자 또한 미남인 데다 말솜씨까지 좋은 이양구 총각의 첫인상이 맘에 쏙 들었다.
얼마 후 양가 친지들이 모인 가운데 정갈하고 조촐하게 약혼례를 치렀다.
그로부터 서남은 아내의 아름다움과 덕성에 대한 자부심을 평생 일관되게 유지했다.
천생연분인 두 사람은 마산에 사는 지인에게 돈을 빌려 부산 영도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였다. 살림 도구라야 숟가락 두 개, 밥그릇 두 개, 사과궤짝 밥상이 전부였다. 그러나 이 여사는 “이때가 일생 중 가장 행복한 시절”이라고 기억한다.
그리고 이 여사는 이때를 떠올리며 신혼부부들에게 자주 이렇게 충고했다.
“월급이 충분하지 않지? 그러나 행복은 그것만으로 채워지는 것은 아니야. 부부간에 정이 있으면 어려움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어. 근면하고 알뜰하면 생활은 나아지게 되어 있어. 그러니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건 부부가 서로 극진하게 아끼고 사는 것, 바로 그거예요.”
당신의 신혼 시절 어려움을 아름답게 간직했기에, 이 여사의 말은 진실성 있게 다가온다.
온갖 어려움 극복… 재기 성공
이 여사는 1971년 9월, 동양시멘트가 법정 관리에 들어갔던 때를 또렷하게 기억한다. 이때는 남편 서남 회장뿐 아니라 가족 모두에게 두 번 다시 없는 시련의 계절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여사는 남편과 함께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재기에 성공하기까지의 과정을 겪으면서 서남에 대한 정말 뿌듯한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서남의 아내로 살아온 보람을 느꼈다.
생전의 이양구 회장은 손님들을 집으로 모셔와 담론을 즐겼다. 추운 날 손님들이 오면, 이 여사는 그들의 신발을 라디에이터 열기를 이용해 따뜻하게 데워놓곤 했다. 손님에 대한 안주인의 지극한 정성이 이러한데, 방 안의 담론이 어찌 따뜻하지 않았겠는가.
두 딸이 학교에 다닐 때 어머니는 외출을 했다가도 딸들이 귀가하는 시간보다 먼저 집에 들어와 딸들을 기다렸다. 아무리 바쁘고 중요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보다는 귀가하는 딸들을 맞이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딸들이 집에 왔을 때, 어머니의 부재로 인해 느낄지도 모를 허전함을 경계한 것이다. 잠깐 동안의 허전함이겠지만 그것조차도 이관희 여사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가슴으로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의 마음이 아닐 수 없다.
서남 회장이 떠나기 전 6년 동안, 이 여사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 5시면 일어나 병상의 남편을 위해 자연식 식단을 마련하였다. 이런 온갖 정성을 기울인 간병에도 불구하고 서남 회장은 저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서남 회장을 떠나보낸 후 이 여사는 3년 동안 외출도 삼갔다. 말까지 절제하며 서남에 대한 추모의 예를 다했다. 문밖출입을 삼간 정도가 아니라 뒤뜰에조차 나가려 하지 않았다.
1989년부터 이관희 여사는 서남재단의 이사장직을 맡아 남편의 유지인 사회봉사 활동에 열중했다. 서남 회장은 구두쇠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검소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소유 주식을 이화여대에 기증하고, 서남재단을 설립하는 등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투자했다. 서남의 유지를 계승한다는 의미도 있고 해서, 이 여사는 재단 운영에 더욱 열성을 다했다. 서남이 떠난 빈자리를 사랑의 봉사로 메워나간 것이다.
이 여사는 어린이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작으나마 따뜻한 희망의 집을 열었다. 1991년, 서대문구 충정로 3가에 ‘별나라 어린이집’을 세운 것이다. 이름 그대로 어린이들을 위한 ‘별나라’이다. 가난한 영세민 아이들, 소년 소녀 가장들, 소득 수준이 낮은 편부 편모 슬하의 아이들을 돌보는 ‘별나라’였다.
이곳은 이 여사 가족이 30여 년 동안 머물던 소중한 공간이기도 했다. 서남 회장은 생전에 “인생은 공수래공수거야.”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런 마음의 깨달음이 있었기에 저 세상으로 가기 전에 정들었던 집을 재단에 선뜻 내놓은 것이다. 당신 가족의 일상이 배어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여사는 이런 남편의 뜻을 헤아렸다. 그래서 이곳을 개조해 불우한 어린이들을 돌봐주는 ‘별나라 어린이집’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또 남 몰래 도와온 양로원도 적지 않았다.
이처럼 이관희 여사의 모든 일상에서 항상 서남에 대한, 서남을 향한 그리움의 정이 흐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 여사의 가족으로는 이혜경(동양그룹 고문), 이화경(오리온그룹 사장) 두 딸과 큰사위 현재현(동양그룹 회장), 둘째사위 담철곤(오리온그룹 회장)이 있다.
[정리=이범희 기자] skycros@dailysun.co.kr
[자료제공:한결미디어]
정리=이범희 기자 skycros@da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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