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감방 한번 안가고 경영 하겠어?”

국내 경제를 이끌어온 재벌가의 활약에는 수많은 미사여구가 따라다닌다. 각 기업에서 창업주 및 선대 회장의 경영에 대해 앞다퉈 전기를 출판하는 것도 이런 미화와 무관치 않다. 이런 스포트라이트 뒤에는 어두운 과거도 있다. 국내 내로라는 재벌가에서 범죄를 받아 전과자가 된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대체로 이들은 집행유예 등의 솜방망이 처벌만 받았을 뿐 별 다른 불편함 없이 재벌총수 직함을 유지하고 있다. 재벌가의 전과 실태를 짚어봤다.
정치권에서 ‘전과’는 일종의 훈장이다. 군부정권 시절 사회운동에 적극적이었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정치권 바깥으로 나가면 이같은 경력은 흠집으로 남을 뿐이다. 일반인의 범죄경력은 곧 불이익으로 이어진다. 전과자의 취업이 힘든 것은 물론이고 일부 경우에는 낙인처럼 범죄경력이 따라붙는다.
반면 이런 편견과 무관한 사람들도 있다. 바로 재벌가다. 재벌총수들이 사회운동에 참여했을 리도 없건만 ‘전과’를 보유한 총수는 적지 않다.
비자금으로 얼룩진 재벌가
재벌가의 ‘전과’는 대체로 기업 운영과정에 비자금을 축적한 범죄에 집중돼 있다. 재벌총수가 기업을 좌지우지 할 정도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보니 비자금 조성, 분식회계 등을 내부에서 견제하지 못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분식회계로 전과자가 된 경우다. 사건은 2003년 3월 SK글로벌(현 SK네트웍스)의 분식회계 사건에서 비롯됐다. SK글로벌은 회계 분식을 통해 총 1조5587억원의 이익을 부풀렸고 손익계산서상 당기순손실 1226억원을 과소계상했다.
이로 인해 최태원 회장, 손길승 SK텔레콤 명예회장(당시 회장) 등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위반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 됐다. 그뿐 아니라 SK글로벌은 유동성위기에 몰려 채권단 공동관리에 들어가고, 최태원 회장의 주식 전부가 채권단에 담보로 잡히는 등 그룹자체가 흔들리는 타격을 입었다. 당시 최태원 회장은 1심은 징역 3년을 선고 받았고, 2심에서는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형제끼리 분쟁으로 재벌가의 비리가 만천하에 공개된 경우도 있다. 두산은 지난 2005년 ‘형제의 난’에서 불법 사실이 폭로된 경우다. 형제들 사이에서 축출될 위기에 놓인 당시 박용오 전 두산중공업 회장(현 성지건설 회장)이 검찰 투서로 재계를 발칵 뒤집었다. 당시 투서에는 박용성 두산그룹 회장 박용만 두산인프라코어 회장이 1700억대의 비자금을 불법 조성해 사용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결국 검찰의 수사 끝에 박용오 전 회장이 제보한 내용대로 비자금조성과 횡령, 분식회계 등 각종불법행위가 속속들이 드러났다. 검찰에 따르면 이들은 두산산업개발의 전신인 두산건설이 협력업체에 외주 공사비를 과다 지급한 후 차액을 돌려받는 방법으로 비자금을 만들었으며, 회계법인 감사를 피하려고 가짜 공사원가 전표를 제출해 분식회계도 시도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박용성·박용만 형제는 각각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이 선고됐다.
총수의 전과는 ‘한때의 과오’
심지어 제보자인 박용오 전 회장도 횡령에 대한 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기까지 했다.
재벌그룹 내부에서는 이런 총수의 ‘아픈 과거’에 대해 언급하기를 극도로 꺼려했다. 그야말로 한때의 과오라는 입장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총수의 전과는 있지만 없는 과거처럼 치부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회장의 대외행보에 있어 큰 불편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재계 일각에서는 이같은 재벌가의 전과가 불가피한 시대의 희생양이었다고 설명한다.
재계 한 전문가는 “재벌에 대한 수사는 늘 정치논리와 맞닿아 있었다”며 “정치자금을 후원하지 않으면 각종 보복이 따르는 시대적인 문제였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다른 의견도 있다.
시민단체 한 관계자는 “결국 각종 편법과 불법을 통해 재벌가의 명맥이 유지 돼 왔다는 점은 더 이상 그들이 더 이상 도덕적인 자본을 모으지 않았다는 뜻”이라며 “특히 최근 재벌가의 유죄는 승계 및 부정한 부의 축적이 주를 이루고 있다”고 반박했다.
#재벌그룹, 총수뿐만 아니라 측근도 전과 투성이
정치권 로비 주체는 모두 2인자?
재계에서 잊을만하면 불거지는 이슈로 재벌그룹의 정치권 로비를 빼놓을 수 없다.
국내 재벌사에서는 꾸준히 불법 정치자금 제공이 드러나 사회를 발칵 뒤집곤 했다. 이같은 불법 정치자금 사건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대부분의 사건을 재벌총수가 아닌 2인자가 주도했다는 것이다.
지난 2002년 삼성그룹은 대선에서 이학수 삼성그룹 전 부회장이 한나라당 및 노무현 당시 대선후보의 측근과 김종필 자민련 총재 등에게 385억원을 불법자금을 제공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 이건희 삼성그룹 전 회장에 대해서는 소환조사 없이 무혐의로 종결됐다. 이와 관해 처벌을 받은 것은 이학수 전 부회장이다. 이건희 전 회장의 재산을 임의로 정치자금으로 제공했다는 것이다.
현대차그룹도 2003년 대기업 전반에 걸친 대선자금 수사때 한나라당에 불법자금 100억원을 건넸다는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현대차의 2인자로 통하는 김동진 그룹 총괄부회장은 불구속 기소돼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같은해 SK그룹도 100억원의 ‘검은 돈’이 지난 대선에서 한나라당에 흘러 들어간 것이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2003년 대선자금 수사때 비자금 100억원을 한나라당 최돈웅 의원에게, 11억원을 최도술 청와대 비서관에게 전달한 사실이 검찰에 의해 확인됐다. 이 건으로 처벌을 받은 것 역시 2인자 손길승 SK텔레콤 명예회장(당시 회장)과 김창근 부회장었다.
이런 경향은 일부 재벌그룹에 국한되지 않는다.
롯데건설도 임승남 전 사장이 2003년 1월부터 2004년 10월까지 협력업체에 공사비를 과다지급한 뒤 차액을 반환받는 수법으로 비자금 43억여원을 조성, 이 중 10억원을 불법 정치자금으로 사용한 혐의 등으로 기소돼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한화그룹은 2004년말 대한생명 인수 비리 의혹과 관련한 검찰 수사에서 정·관계 로비자금 등으로 87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것으로 드러나 그룹 2인자인 김연배 부회장이 사법처리 됐다.
이같은 2인자의 사법처리는 총수 안전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거액이 오가는 불법 정치자금을 그룹 총수가 몰랐다는 것을 납득하기 어렵다”며 “총수를 지키기 위해 2인자가 모든 혐의를 짊어지는 것 아니겠느냐”라고 의혹을 제기했다.
강필성 기자 feel@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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